#여러 가지 잡다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여동생과 근근히 살아가는 상진, 락커를 꿈꾸는 바람, 미국에서 유학하다 돌아온 오렌지족 승현, 고시공부를 하지만 실패하는 선우는 우연히 아마존이라는 나이트 클럽에서 만난다. 승현은 바람을 보고 첫 눈에 반하게 되고 에덴이라는 건물에 자리잡은 락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바람과 친해지려 한다. 한편 선우, 상진도 그 건물에서 각각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 그들은 한 건물에 자리잡게 되는데... 하지만 서로 어긋나기만 하는 젊음. 선우는 상진의 여동생을 임신시키지만 그녀를 버리고, 바람은 앨범 발매에 앞서 콘서트를 열고, 승현은 다시 미국으로 떠나게 되고, 상진은 친구와 강도짓을 하다 경찰에 쫓긴 채 바람의 콘서트장을 향해 오토바이를 몬다.
자신의 영화들을 통해 일관되게 자신의 스타일, 자신의 이념, 자신의 이야기들을 표현하는 감독을 우리는 흔히 작가라 부른다. 그렇다면 또 한명의 작가가 탄생하는 것인가! 영화 질주는 이상인 감독의 데뷔작이긴 하지만 서울 국제 단편 영화제에서 그의 작품 '낙타 뒤에서'를 본 사람이라면 슬며시 이런 생각을 떠올려 봄직도 하다. 여러 인물을 통해 구체화되는 사건, 필요에 의해 사건들이 삽입되는 비연대기적 시간구성, 특징적인 우화의 끼워넣기, 전체적으로 어둡고 불분명한 명암으로 이루어진 화면 등은 그 스타일에서의 특성이 '낙타 뒤에서'와 '질주'가 거의 같은 연장선 상에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스타일의 유사함은 그리 유쾌하지 않다. 그리고 작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조롱에 가깝다. 과연 위에서 열거한 그의 스타일로 앞으로 몇 작품이나 더 울궈먹을 수 있을까? 때문에 '질주'는 '낙타 뒤에서'라는 자신의 단편 영화를 반복한 판박이 쯤에 불과하고 감독의 창의력이 거기서 거기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매번 뻔하고 같은 영화만 만드는 감독.... 왕가위가 유행에 불과했던 이유이며, 신승수가 그 많은 작품에도 불구하고 주목받지 못하는 이유이며, 김성수가 빠질지도 모르는 스스로의 무덤이 될 수 있는 이유이다. 그러나 용서하자. '낙타 뒤에서'와 '질주'는 비상업영화와 상업영화, 단편 영화와 장편 영화라는 엄중한 차이가 있으니까. '낙타 뒤에서'를 모두 다 잊고 질주만 보기로 하자. 옛날에 작업한 단편 영화까지 캐내 따지려 들면 무지하게 치사한 놈이라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줄곧 이 영화를 보면서 떠오르는 짐자무쉬의 '천국보다 낯선'을 지울 수는 없었다. 아니 어쩜 이렇게도 비슷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낙타 뒤에서'가 '라쇼몽'의 내러티브 구조를 따르고 있다면 '질주'는 '천국보다 낯선'의 내러티브 구조를 따르고 있다. 흑백대신 칼라로, 연대기적 시간 구성을 다소 비연대기적으로 바꾼 것만 뺀다면 기본 뼈대는 거의 흡사하다. 몇 명의 인물이 있고 그 인물이 현실에서 절망하다가 잠깐 꿈을 꾸지만 결국은 현실에 갇힌다. 이를 위해 촬영은 최대한 회색빛 도시를 살려 빛과 어둠이 혼재한 화면을 만들고, 자막과 까만 삽입화면을 통해 사건을 분절시키고, 사건을 추적하여 인물을 제시하는 것 대신 인물을 추적하여 사건을 제시하는 것까지....에이, 그건 너무 비약한 것 같다고... 독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난 확실히 자무쉬의 냄새를 맡았다. 영화 막바지에 승현이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가는 장면을 보라. 멀리 하늘을 나는 비행기 밑에 차을 세워두고 비행기를 쳐다보는 승현 친구의 모습은 '천국보다 낯선'에서 차를 세워두고 주인공이 탄 비행기를 쳐다보는 그의 친구의 모습과 거의 흡사하지 않은가! 구조 뿐만 아니라 화면 구성까지 흉내낸 것이다. 물론 이상인 감독에게 직접 물어보면 알 수 있는 부분이지만 분명 짐 자무쉬에게 영향받은 바가 큰 듯하다. 짐 자무쉬가 잘 나긴 잘 났다보다. 과거에 김홍준의 정글 스토리 역시 그 구조를 따르더니만 이상인 역시 이를 흉내낸다. 그러나 이 역시 용서하자. 미술은 임화부터 시작하고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 했다. 대책없이 총쏘고 폭탄터지는 영화 흉내내는 것보다 고고한 자무쉬를 흉내내는 것이 백번 잘한 일이니 다시 한 번 눈감아 주기로 하자.
영화가 들여다 보는 것은 청춘이자 젊음이다. 한 녀석(상진)은 부자를 꿈꾸고 한 녀석(승현)은 진실한 사랑을 꿈꾸고 한 녀석(바람)은 음악을 꿈꾸고 한 녀석(선우)은 출세를 꿈꾼다. 이 네 명의 젊음 중 그 균형을 유지해 주는 이는 바람이며 그 양 옆에 상진과 승현이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그녀와 직접 관계하고 있으며 선우는 다시 그 셋의 삼각구도에서 떨어져 새롭게 자리하고 있다. 이 셋의 삼각구도를 주목해보자. 먼저 상진과 바람의 관계 설정이나 두 인물의 상황 전개는 그럴싸 하다. 같은 건물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우연히 알게되고 표현은 못하지만 서로 좋은 감정을 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승현과 바람의 관계 설정은 어설프다. 승현이 성취하려는 사랑이 바람을 통해 전혀 구체화되지 못하여 그들의 첫만남에서 승현이 바람을 사랑하게 되는 모티브가 너무 빈약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아니다. 삼각구도의 한 변은 그 구성이 탄탄하지만 다른 한 변이 부실할 때 그 구도는 정삼각형을 이루지 못하고 한 쪽으로 치우치는데 그 지점이 바로 물질과 향락주의라는 소비문화에 맞닿아 있다는 점이 바로 문제의 핵심이다. 곧 승현의 현실과 그의 꿈인 진실된 사랑이란 것이 구체화되어 동기화되지 못할 때 내러티브의 비중은 상진에게로 흘러가는데 상진은 물질주의의 현실에 압도당해 그 극복을 다시 물질과 향락에서 얻으려 한다. 그의 꿈 '스포츠카에 여자를 태우고 해변으로 달리는 것'에는 물질주의와 향락주의가 녹아 있으며 매일같이 그럴 수 있는 승현의 현실과 교통하여 승현과의 자리바꿈이 다시 그의 꿈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승현의 현실이 긍정적인가? 그렇지 못하다. 그 역시 자신의 현실의 문제와 당면하여 꿈을 꾸는 입장이다. 하지만 내러티브는 부정적인 가치 즉 물질주의의 극복을 다시 부정적 가치에 편입함으로써 얻으려하는 딜레마에 빠져있으며 이는 곧 감독 자신의 딜레마이다. 결국 네 청춘을 조명함으로써 성취하려 했던 이 영화의 본래 의도는 희미해지고 물질과 향락주의에 대한 선망과 좌절만이 극대화되는 것이다. 어떤 가치와 이상에 좌절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욱 빛나 보인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물질주의에 대한 선망은 얼마나 과장될 것인가? 감독-그가 각본까지 겸했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고 그래서 그에 대한 보호책으로 승현을 설정했다. 곧 승현은 감독의 무의식이 내러티브에 반영되는 것을 막는 검열관 역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 검열이 실패해버렸는데 이는 감독의 관심이, 그리고 감독 자신이 묘사할 수 있는 발디딘 현실이 바로 상진이었기 때문이다. 고로 상진은 감독의 분신이며 물질주의의 숭배자이다. 검열관이 존재하기에 그 숭배는 더욱 잠재적이지만 더욱 욕망적이다. 앞서 말했듯이 감독은 물질주의에 대한 해소를 위해 이 작품을 만들었지만 결국 이미 그 자신이 그것을 선망하고 있다는 악순환과 같은 딜레마만 보여줬을 따름이다.
이 영화의 편집 역시 이상인 감독 스스로 해냈다. 감독, 각본, 편집의 1인 3역을 수행해 낸 것이다. '미술관 옆 동물원'에서 이정향 감독이 제작 과정 전반에 대한 지배력이 약했던지 각 부분이 유기적이지 못했다는 사실과 비교해보면 감독이 제작의 여러 부분을 책임지고 연출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며 사실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도 편집에서 찾을 수 있다. 관객을 사고하게 하는데 가장 유효하게 쓰이는 것은 소격효과이다. 그리고 많은 영화들이 이 효과를 위해 롱테이크나 롱샷 등을 이용한다. 그러나 질주에서는 이 효과를 편집을 통해 성취해 내는 것이다.
앞서 전언했듯이 이 영화는 연대기적 시간 구성을 주로 한 다음에 비연대기적 시간 구성을 부로 하고 있다. 특히 중요한 모티브나 행위 동기, 심리적 동인에 해당하는 장면은 비연대기적으로 회상씬을 통해 이뤄진다. 그러나 그 역시 한 번에 제시되는 것이 아니다. 바람의 회상씬 중 하나에 등장하는 앰블란스는 극의 후반에 가서야 설명되며 그 회상씬마저 너무 불친절하게도 학교가는 바람, 앰블란스를 보는 바람, 락바 앞에 서 있는 바람 등 아무 연관이 없는 듯한 컷트들의 나열로 구성된다. 극을 쫓는 관객은 그 아무 연관없는 컷트들을 인과적으로 구성하기 위해 그리고 그 컷트 속에서 인물의 모티브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추리해야 한다. 또한 내러티브를 충실히 설명하는 연속편집보다 감독의 의도를 쫓아 과감히 생략되거나 혹은 추가되는 심리적, 주제적 편집이 이러한 효과를 살리는 데 크게 한 몫한 것이다.
자! 이제 결론을 이야기 하자. 청춘의 방황과 절망을 담은 영화 중에 굵직한 것들을 나열해 보면 '비트' '태양은 없다' '세친구' 그리고 이 영화 '질주' 정도... 그 중 '비트'와 '태양은 없다'는 청춘을 가장 요즘의 청춘다운 MTV의 통조림에 깔끔하게 포장해서 시대에 걸맞는 청춘을 보여줬다. 뭐, 깡통을 따면 매한가지 내용물이지만, 더군다나 깡통 포장에 돈이 더 많이 들어 내용물은 부실하지만, 포장에 신경을 쓴다는 것은 많이 팔아 보겠다는 것 아닌가! 그래서 많이 팔았으니 의도대로 된 셈이고 나무랄 데는 없다. 아니, 오히려 포장기술 발전에 이바지했다는 치하할 공이 있다. '세친구'는 섣불리 말하기 어렵다. 포장에도 내용에도 아무런 신경을 안 쓴 듯 보인다. 그래서 잘 난 누군가는 '아마추어' 영화라고 쉽게 비하하더라.... 그렇지, 그럴수도 있지. 프로라면 한 번이라도 홈런 많이 치려고 철저하게 자기 관리 해야되고, 한 상자라도 더 많이 팔라고 구라치는 법 연습하고 이미지 관리해야 되고 그래야 될 테니까.... 그러나 진정한 프로에게는 대상에 대한 애정이 필요하다. 말굽을 박는 이는 말의 고통을 생각해야 하고 농자는 땅에 대한 애정이 무엇보다도 우선인 것이다. 증빙 안된 방법으로 구라치고 포장하는 것보다는 대상에 대한 애정으로 현실을 가공하지 않으려는 그 정신은 그 잘난 누군가의 '아마추어'란 비아냥에 어울리지 않다.
그렇다면 '질주'는 어디에 위치할까? '태양은 없다'의 촬영과 편집의 장치들이 단지 포장을 위해 쓰인 것이라고 한다면 '질주'의 촬영과 편집의 장치는 내용물을 위해 사용되었다. 즉, 의미없이 시각적 쾌감만을 위해 대상을 가공한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대상을 새롭게 제시함으로써 또 다른 효과와 시각으로 대상을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이다. 이것은 다시 대상에 대한 관심이 다른 것보다 우선한다는 이야기이며 이렇게 대상을 우선시 삼는 정신은 오히려 '세친구'의 정신과 상통한다. 따라서 극보다는 일상이 중요하고 사건보다는 인물이 더 중요하다.
그러나 결국 이들은 차이가 있으며 이들의 차이는 '세친구'가 순 자연산 삼계탕이고 '태양은 없다'가 대형 할인점 포장 닭 정도이며 '질주'는 후라이드 치킨 정도에 위치한다는 점이다. 셋 다 나름의 용도가 분명히 있듯이 셋 다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질주'에는 요리사의 솜씨가 부족하다. 전언했듯이 '질주'가 몸담고 있는 세계관이 물질주의에 국한되어 벗어 나오지 못하는 한, 그리고 그 세계 안에 갇혀 있는 인물-감독을 포함하여-이 있는 한 그것은 대상에 대한 바른 조명이 되지 못한다. 대상에 대한 관심은 있지만 바른 대상을 선택하는 눈은 부족한 것이다. 병든 닭만을 고르는 요리사의 솜씨로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없다. 때문에 감독은 그의 작품의 배우들과 함께 아직 언더그라운드에 묻혀 있는 꼴이다. 그가 세상 위로 오르기 위해선 그 스스로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너무 슬퍼할 이유는 없다. 그가 묻혀 있는 언더그라운드는 에덴이라는 이름을 가진 빌딩의 지하이니까... 그가 대상을 올곧게 조명하기만 한다면 그의 재기와 능력은 곧 그를 에덴으로 인도할 것이다. 아닐 것 같다구? 우리 내기하자! 이상인 감독의 다음 작품을 걸고....
철구 백
자신의 영화들을 통해 일관되게 자신의 스타일, 자신의 이념, 자신의 이야기들을 표현하는 감독을 우리는 흔히 작가라 부른다. 그렇다면 또 한명의 작가가 탄생하는 것인가! 영화 질주는 이상인 감독의 데뷔작이긴 하지만 서울 국제 단편 영화제에서 그의 작품 '낙타 뒤에서'를 본 사람이라면 슬며시 이런 생각을 떠올려 봄직도 하다. 여러 인물을 통해 구체화되는 사건, 필요에 의해 사건들이 삽입되는 비연대기적 시간구성, 특징적인 우화의 끼워넣기, 전체적으로 어둡고 불분명한 명암으로 이루어진 화면 등은 그 스타일에서의 특성이 '낙타 뒤에서'와 '질주'가 거의 같은 연장선 상에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스타일의 유사함은 그리 유쾌하지 않다. 그리고 작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조롱에 가깝다. 과연 위에서 열거한 그의 스타일로 앞으로 몇 작품이나 더 울궈먹을 수 있을까? 때문에 '질주'는 '낙타 뒤에서'라는 자신의 단편 영화를 반복한 판박이 쯤에 불과하고 감독의 창의력이 거기서 거기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매번 뻔하고 같은 영화만 만드는 감독.... 왕가위가 유행에 불과했던 이유이며, 신승수가 그 많은 작품에도 불구하고 주목받지 못하는 이유이며, 김성수가 빠질지도 모르는 스스로의 무덤이 될 수 있는 이유이다. 그러나 용서하자. '낙타 뒤에서'와 '질주'는 비상업영화와 상업영화, 단편 영화와 장편 영화라는 엄중한 차이가 있으니까. '낙타 뒤에서'를 모두 다 잊고 질주만 보기로 하자. 옛날에 작업한 단편 영화까지 캐내 따지려 들면 무지하게 치사한 놈이라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줄곧 이 영화를 보면서 떠오르는 짐자무쉬의 '천국보다 낯선'을 지울 수는 없었다. 아니 어쩜 이렇게도 비슷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낙타 뒤에서'가 '라쇼몽'의 내러티브 구조를 따르고 있다면 '질주'는 '천국보다 낯선'의 내러티브 구조를 따르고 있다. 흑백대신 칼라로, 연대기적 시간 구성을 다소 비연대기적으로 바꾼 것만 뺀다면 기본 뼈대는 거의 흡사하다. 몇 명의 인물이 있고 그 인물이 현실에서 절망하다가 잠깐 꿈을 꾸지만 결국은 현실에 갇힌다. 이를 위해 촬영은 최대한 회색빛 도시를 살려 빛과 어둠이 혼재한 화면을 만들고, 자막과 까만 삽입화면을 통해 사건을 분절시키고, 사건을 추적하여 인물을 제시하는 것 대신 인물을 추적하여 사건을 제시하는 것까지....에이, 그건 너무 비약한 것 같다고... 독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난 확실히 자무쉬의 냄새를 맡았다. 영화 막바지에 승현이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가는 장면을 보라. 멀리 하늘을 나는 비행기 밑에 차을 세워두고 비행기를 쳐다보는 승현 친구의 모습은 '천국보다 낯선'에서 차를 세워두고 주인공이 탄 비행기를 쳐다보는 그의 친구의 모습과 거의 흡사하지 않은가! 구조 뿐만 아니라 화면 구성까지 흉내낸 것이다. 물론 이상인 감독에게 직접 물어보면 알 수 있는 부분이지만 분명 짐 자무쉬에게 영향받은 바가 큰 듯하다. 짐 자무쉬가 잘 나긴 잘 났다보다. 과거에 김홍준의 정글 스토리 역시 그 구조를 따르더니만 이상인 역시 이를 흉내낸다. 그러나 이 역시 용서하자. 미술은 임화부터 시작하고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 했다. 대책없이 총쏘고 폭탄터지는 영화 흉내내는 것보다 고고한 자무쉬를 흉내내는 것이 백번 잘한 일이니 다시 한 번 눈감아 주기로 하자.
영화가 들여다 보는 것은 청춘이자 젊음이다. 한 녀석(상진)은 부자를 꿈꾸고 한 녀석(승현)은 진실한 사랑을 꿈꾸고 한 녀석(바람)은 음악을 꿈꾸고 한 녀석(선우)은 출세를 꿈꾼다. 이 네 명의 젊음 중 그 균형을 유지해 주는 이는 바람이며 그 양 옆에 상진과 승현이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그녀와 직접 관계하고 있으며 선우는 다시 그 셋의 삼각구도에서 떨어져 새롭게 자리하고 있다. 이 셋의 삼각구도를 주목해보자. 먼저 상진과 바람의 관계 설정이나 두 인물의 상황 전개는 그럴싸 하다. 같은 건물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우연히 알게되고 표현은 못하지만 서로 좋은 감정을 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승현과 바람의 관계 설정은 어설프다. 승현이 성취하려는 사랑이 바람을 통해 전혀 구체화되지 못하여 그들의 첫만남에서 승현이 바람을 사랑하게 되는 모티브가 너무 빈약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아니다. 삼각구도의 한 변은 그 구성이 탄탄하지만 다른 한 변이 부실할 때 그 구도는 정삼각형을 이루지 못하고 한 쪽으로 치우치는데 그 지점이 바로 물질과 향락주의라는 소비문화에 맞닿아 있다는 점이 바로 문제의 핵심이다. 곧 승현의 현실과 그의 꿈인 진실된 사랑이란 것이 구체화되어 동기화되지 못할 때 내러티브의 비중은 상진에게로 흘러가는데 상진은 물질주의의 현실에 압도당해 그 극복을 다시 물질과 향락에서 얻으려 한다. 그의 꿈 '스포츠카에 여자를 태우고 해변으로 달리는 것'에는 물질주의와 향락주의가 녹아 있으며 매일같이 그럴 수 있는 승현의 현실과 교통하여 승현과의 자리바꿈이 다시 그의 꿈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승현의 현실이 긍정적인가? 그렇지 못하다. 그 역시 자신의 현실의 문제와 당면하여 꿈을 꾸는 입장이다. 하지만 내러티브는 부정적인 가치 즉 물질주의의 극복을 다시 부정적 가치에 편입함으로써 얻으려하는 딜레마에 빠져있으며 이는 곧 감독 자신의 딜레마이다. 결국 네 청춘을 조명함으로써 성취하려 했던 이 영화의 본래 의도는 희미해지고 물질과 향락주의에 대한 선망과 좌절만이 극대화되는 것이다. 어떤 가치와 이상에 좌절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욱 빛나 보인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물질주의에 대한 선망은 얼마나 과장될 것인가? 감독-그가 각본까지 겸했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고 그래서 그에 대한 보호책으로 승현을 설정했다. 곧 승현은 감독의 무의식이 내러티브에 반영되는 것을 막는 검열관 역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 검열이 실패해버렸는데 이는 감독의 관심이, 그리고 감독 자신이 묘사할 수 있는 발디딘 현실이 바로 상진이었기 때문이다. 고로 상진은 감독의 분신이며 물질주의의 숭배자이다. 검열관이 존재하기에 그 숭배는 더욱 잠재적이지만 더욱 욕망적이다. 앞서 말했듯이 감독은 물질주의에 대한 해소를 위해 이 작품을 만들었지만 결국 이미 그 자신이 그것을 선망하고 있다는 악순환과 같은 딜레마만 보여줬을 따름이다.
이 영화의 편집 역시 이상인 감독 스스로 해냈다. 감독, 각본, 편집의 1인 3역을 수행해 낸 것이다. '미술관 옆 동물원'에서 이정향 감독이 제작 과정 전반에 대한 지배력이 약했던지 각 부분이 유기적이지 못했다는 사실과 비교해보면 감독이 제작의 여러 부분을 책임지고 연출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며 사실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도 편집에서 찾을 수 있다. 관객을 사고하게 하는데 가장 유효하게 쓰이는 것은 소격효과이다. 그리고 많은 영화들이 이 효과를 위해 롱테이크나 롱샷 등을 이용한다. 그러나 질주에서는 이 효과를 편집을 통해 성취해 내는 것이다.
앞서 전언했듯이 이 영화는 연대기적 시간 구성을 주로 한 다음에 비연대기적 시간 구성을 부로 하고 있다. 특히 중요한 모티브나 행위 동기, 심리적 동인에 해당하는 장면은 비연대기적으로 회상씬을 통해 이뤄진다. 그러나 그 역시 한 번에 제시되는 것이 아니다. 바람의 회상씬 중 하나에 등장하는 앰블란스는 극의 후반에 가서야 설명되며 그 회상씬마저 너무 불친절하게도 학교가는 바람, 앰블란스를 보는 바람, 락바 앞에 서 있는 바람 등 아무 연관이 없는 듯한 컷트들의 나열로 구성된다. 극을 쫓는 관객은 그 아무 연관없는 컷트들을 인과적으로 구성하기 위해 그리고 그 컷트 속에서 인물의 모티브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추리해야 한다. 또한 내러티브를 충실히 설명하는 연속편집보다 감독의 의도를 쫓아 과감히 생략되거나 혹은 추가되는 심리적, 주제적 편집이 이러한 효과를 살리는 데 크게 한 몫한 것이다.
자! 이제 결론을 이야기 하자. 청춘의 방황과 절망을 담은 영화 중에 굵직한 것들을 나열해 보면 '비트' '태양은 없다' '세친구' 그리고 이 영화 '질주' 정도... 그 중 '비트'와 '태양은 없다'는 청춘을 가장 요즘의 청춘다운 MTV의 통조림에 깔끔하게 포장해서 시대에 걸맞는 청춘을 보여줬다. 뭐, 깡통을 따면 매한가지 내용물이지만, 더군다나 깡통 포장에 돈이 더 많이 들어 내용물은 부실하지만, 포장에 신경을 쓴다는 것은 많이 팔아 보겠다는 것 아닌가! 그래서 많이 팔았으니 의도대로 된 셈이고 나무랄 데는 없다. 아니, 오히려 포장기술 발전에 이바지했다는 치하할 공이 있다. '세친구'는 섣불리 말하기 어렵다. 포장에도 내용에도 아무런 신경을 안 쓴 듯 보인다. 그래서 잘 난 누군가는 '아마추어' 영화라고 쉽게 비하하더라.... 그렇지, 그럴수도 있지. 프로라면 한 번이라도 홈런 많이 치려고 철저하게 자기 관리 해야되고, 한 상자라도 더 많이 팔라고 구라치는 법 연습하고 이미지 관리해야 되고 그래야 될 테니까.... 그러나 진정한 프로에게는 대상에 대한 애정이 필요하다. 말굽을 박는 이는 말의 고통을 생각해야 하고 농자는 땅에 대한 애정이 무엇보다도 우선인 것이다. 증빙 안된 방법으로 구라치고 포장하는 것보다는 대상에 대한 애정으로 현실을 가공하지 않으려는 그 정신은 그 잘난 누군가의 '아마추어'란 비아냥에 어울리지 않다.
그렇다면 '질주'는 어디에 위치할까? '태양은 없다'의 촬영과 편집의 장치들이 단지 포장을 위해 쓰인 것이라고 한다면 '질주'의 촬영과 편집의 장치는 내용물을 위해 사용되었다. 즉, 의미없이 시각적 쾌감만을 위해 대상을 가공한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대상을 새롭게 제시함으로써 또 다른 효과와 시각으로 대상을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이다. 이것은 다시 대상에 대한 관심이 다른 것보다 우선한다는 이야기이며 이렇게 대상을 우선시 삼는 정신은 오히려 '세친구'의 정신과 상통한다. 따라서 극보다는 일상이 중요하고 사건보다는 인물이 더 중요하다.
그러나 결국 이들은 차이가 있으며 이들의 차이는 '세친구'가 순 자연산 삼계탕이고 '태양은 없다'가 대형 할인점 포장 닭 정도이며 '질주'는 후라이드 치킨 정도에 위치한다는 점이다. 셋 다 나름의 용도가 분명히 있듯이 셋 다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질주'에는 요리사의 솜씨가 부족하다. 전언했듯이 '질주'가 몸담고 있는 세계관이 물질주의에 국한되어 벗어 나오지 못하는 한, 그리고 그 세계 안에 갇혀 있는 인물-감독을 포함하여-이 있는 한 그것은 대상에 대한 바른 조명이 되지 못한다. 대상에 대한 관심은 있지만 바른 대상을 선택하는 눈은 부족한 것이다. 병든 닭만을 고르는 요리사의 솜씨로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없다. 때문에 감독은 그의 작품의 배우들과 함께 아직 언더그라운드에 묻혀 있는 꼴이다. 그가 세상 위로 오르기 위해선 그 스스로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너무 슬퍼할 이유는 없다. 그가 묻혀 있는 언더그라운드는 에덴이라는 이름을 가진 빌딩의 지하이니까... 그가 대상을 올곧게 조명하기만 한다면 그의 재기와 능력은 곧 그를 에덴으로 인도할 것이다. 아닐 것 같다구? 우리 내기하자! 이상인 감독의 다음 작품을 걸고....
철구 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