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너스의 불량

철구's Blog is powered by Textcube

입 닥치고 보기나 하라구? 입에 단내가 나도록 닥치고 봤는데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지 알 수가 없다면? 문제는 '노랑머리'가 너무 애매 모호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저런 얘기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좀처럼 감 잡기가 어려웠다. 물론 보는 이가 자기 경험대로, 혹은 자기 배운 바대로 영화를 이해할 수 있도록 그 가능성을 열어놓는 다는 것은 그래도 흠 잡을 만한 점은 아닌데, 일단은 만든 이가 데이빗 린치가 아닌 이상에야 영화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는 알아야 할 일 이였고 그게 또한 중요한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왜 또 이 영화가 그렇게 잘 나가는 것일까? 동네 비디오 가게 네 다섯군데를 돌아다녀서야 가까스로, 그것도 다섯시간 후에 가져다 준다는 전제하에 겨우 하나 구할 수 있었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찾는 이유는 뭘 까? 더워서 잠이 안 오니까 수면제 대용으로 쓸려고? 아니다. 그것은 아닐게다. TV에서 깜찍하고 귀엽기만 하던 꼬마가 어느덧 어른이 돼서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하고 침대에서도 하고 당구대 위에서도 하는데 잠이 오다니 말도 안되는 소리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영화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고, 또는 그 말이 너무 감동적이고 좋아서 그렇게 열렬히 비디오를 찾는 것일까? 아니다. 이 또한 아닐게다.

그렇다면 답은 나왔다. 결국 이 영화는 '애매 모호'한 메세지로 심각한 척 하면서 섹스를 팔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것도 우리가 친근히 알고 있던 한 꼬마의 알몸과 섹스를 교묘히 이용하면서 영계를 선호하는 관음증의 눈으로 말이다.

가증스러운 '노랑머리' 같으니라구...... 이제 문제는 이 '노랑머리'에 감독이나 작가가 전달하려 하는 메세지가 애매 모호하고 빈약하다는 사실만 입증하는 것만 남았다. 그것만 입증한다면 우리는 '노랑머리'에 숨겨진 얄팍한 속셈을 밝힐 수 있게 된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가 그랬듯이, '창'이 그랬듯이, '처녀들의 저녁식사'가 그랬듯이 사회에 경종과 교훈을 준다는 미명 아래 결과적으로는 우리 사회의 매춘과 관음증을 부채질 해버린 영화의 경솔함을 재확인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재은은 '주목받는' 여배우에서 영화 마케팅에 이용당한 '불쌍한' 여배우로 전락하겠지만.....


'노랑머리'를 선전하는 카피문구들은 다 한마디로 일축된다. 파격적인 섹스신과 한국 영화 사상 첫 등급보류 판정. (언제쯤 등급보류가 사라져 쓸데없는 정력이 소비되지 않는 편안한 세상이 될까?) 그렇다면 '노랑머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sex뿐인가? 아니다. '노랑머리'는 '산업사회 속의 인간' 또는 '사회와 개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다분히 실존적인 영화다. 비인격화되는 산업사회와 그 대립항으로 설정된 본래적이며 원시적인 인간인 유나와 상희, 그리고 그 양자의 경계에서 정체성을 상실한 영규를 통해 이들의 갈등과 좌절이 지금의 사회에서 어떻게 작용하는가, 본래적 인간은 과연 현대 사회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가에 대해 '노랑머리'는 말하려 한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말했나? 문제는 '노랑머리'가 그렇게 말하지 못했거나 그 논거가 애매모호하고 빈약하다는 데 있다. 때문에 먼저 따져들 것은 '노랑머리'의 양식상의 헛점이다.

'노랑머리'의 양식을 말하기 전에 잠깐 올리버 스톤의 '킬러'를 곱씹어보자. 왜냐하면 '킬러' 역시 현대 사회와 그에 대립한 원시적 개인으로서의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주인공인 두 남녀는 원시적 인간이기 때문에 사회의 입장에서 보면 일탈된 인간이다. 그 일탈된 두 남녀는 사회에 정면도전한다. 사회가 정해 놓은 법, 도덕율, 윤리와 같은 것 때문에 더구나 그런 허울 좋은 사회가 권력과 정치에 ('킬러'에서는 분노의 대상이 매스미디어다. 때문에 방송국은 그들에게 테러당한다) 종속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약자를 조종하며 개인을 압제하기 때문에 그들은 개인의 자유의지는 사회를 초월한다고 주장하며 사회의 금기에 과감히 맞서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저항의 수단은 바로 폭력이다.



그런데 한편, 이 '킬러'가 선택한 전체적인 양식은 어떠한가? 자동차를 타고 가는 두 남녀의 마치 추상화와 같이 구성된 씬들이 단적으로 보여주듯이, 빠른 편집과 현란한 카메라 워크, 합성 화면 등은 이 영화가 허구의 세계, 실재하지 않을 듯한 세계를 그리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때문에 '킬러'는 그 선택한 양식의 힘에 의해 다분히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관점에서 말을 하고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메세지를 받아들이는 관객 역시 자의적이며 주관적으로 주인공인 두 남녀를 받아들임으로써 그 주인공들은 관객의 사유의 세계에 존재하는 상징이나 이미지로써 존재할 뿐 현실성은 제거당한다. 곧 '킬러'의 주인공은 감독의 메세지를 전하는 관념의 비유물에 불과하다.

이제 다시 '노랑머리'를 보자. '노랑머리' 역시 '킬러'와 같이 사회로부터 일탈된 원시의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킬러'와 마찬가지로 '노랑머리'의 인물들 역시 비현실적이고, 허구의 상징을 많이 내포하고 있는 관념적인 인물들이다. 그런데 카메라는 이 노랑머리들을 어떻게 포착하고 있는가? 꽤나 현실적인 조명아래에서, 꽤나 긴 호흡으로, 최대한 고정된 시점을 유지한 채 가능한 한 사실적인 방법으로 카메라는 우리에게 '노랑머리'를 이야기한다. 마치 그녀들이 우리 삶의 주위, 우리 현실의 주변 어디엔가에 있을 수 있는 여인들인 것처럼. 그러나 정말 우리의 주변에 그런 인물이 있는가? 두 남자를 연쇄 살인하고, 그룹섹스를 나누며, 때때로 작사를 하며 살아가는 온통 샛노란 머리의 여인이 과연 우리의 옆집에 살고 있는가?

이런 양식과 인물의 부조화는 영화평론가 이영일이 말한 '리얼리티가 영상을 지배함으로써 테마의식은 있으되 예술이라고 볼 수 없는 단계'에 해당하며 이는 곧 주제만 남은 벌거벗은 영화와도 같다. 영어로 판소리를 하는 듯한, 커피 잔에 된장국을 먹는 듯한 부조화가 바로 '노랑머리'의 메세지를 애매 모호하게 하는 가장 큰 주범인 것이다. '의지'라는 관념을 비유하기 위해 '바위'를 끌고 들어와 '바위와 같은 나의 의지'라고 말하는 것과 대책없이 '바위'라는 현실의 사물만 떠들어 대는 것을 비교하면 분명히 전자가 '의지'를 설명하는데 더 명료할 것이다. 영화의 내용이 그에 합당한 양식이나 장치와 만나는 일..... 그것은 영화를 영화적이게 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다.



'노랑머리'의 양식이 이처럼 그 메세지를 애매 모호하게 한 반면 역으로 그 sex씬만은 강화시켰는데 그것은 관음증에 의해서이다. 옛날 한창 에로계를 주름잡던 '나인 하프 위크'나 '투문정션'을 보라. 매끄러운 카메라 워크와 흰 살결에 내리비치는 감각적인 조명. 흥분한 여배우의 C.U 쇼트와 다시 가슴의 C.U 쇼트. 그리고 남자 배우의 쇼트......절정에 이를수록 끈적해지는 음악과 빨라지는 커팅은 관객을 마치 그 sex씬의 복판으로, 오르가즘의 동반자로 함께 몰고 갔었다. 그리고 그러한 sex씬이 또 한때 유행이었었다. 하지만 '노랑머리'는 어떤가? 그 긴 sex씬 전체가 다섯 여섯 쇼트 안팎으로 구성되어 있을 뿐 아니라, 쇼트가 달라지면 카메라 앵글만 바뀔 뿐 카메라의 거리는 여전히 롱쇼트와 풀쇼트 정도, 배경음악은 전혀 없이 실제 사운드만 살렸으며 배우의 연기는 절대 오버 안하고 최대한 리얼하게 갔다. 그렇다면 결국 이러한 양식의 효과는 훔쳐보기인 것이다. 스크린이란 구멍을 통해서 우리 옆집에는 살지도 않는 허무맹랑한 여자들의 잠자리를 훔쳐보는 것.

만약 '노랑머리'의 흥행의 성과가 그 메세지가 아니라면 바로 이 관음증을 자극하는 sex씬만이 '노랑머리'에게 남는 셈이고 끝내 '노랑머리'는 철학을 사칭한 후 심각한 척 하면서 sex를 파는 영화에 불과한 셈이다. 그리고 우리의 귀여운 아역 스타 이재은은 그 교묘한 수단에 속아 예술을 위해 옷을 벗기는 커녕 불쌍하게도 옷벗어 제작자 배불리는데 이용된 것이다. 쯧쯧.... 이재은은 이 사실을 알고나 있는지.....


'노랑머리'의 메세지가 애매모호한 까닭은 내용과 양식의 부조화 때문이었다. 이제는 '노랑머리'의 메세지 자체에 주목하여 이 영화가 말하려는 바가 과연 논리적으로 탄탄한가 알아봐야할 것이다. 앞서 전언했듯이 유나와 상희가 자리한 세계, 그녀들의 '비닐하우스'는 현대사회와 대립한 세계이다. 때문에 현대의 기능적이고 자본적인 인간의 가치가 주목받는 세계가 아닌 본래적이며 원시적인 인간의 가치가 중시 여겨지는 세계이다. 그리고 그녀들은 그러한 자신들의 해방구 안에서 사회가 금기시하는 방법, 즉 원시의 가장 인간적인 방법으로 사회에 도전하며 자신들을 구축하는데 그것이 올리버 스톤의 '킬러'에서는 폭력이었다면 여기서는 sex다. 그들이 트리플 섹스가 가능했던 것은 좀 더 높은 쾌락을 위해서가 아닌, 감독이 자신의 작의(作意)에서 밝힌 바대로, savage의 개념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그녀들의 마지막 동성애 장면 역시 현대에 대한 원시의 정면대응인 것이다. 한편 영규는 현대에 적응하지 못하여 소외되어 가는 또다른 인물이다. 소외된 개인은 일탈한다. 그러한 중간자적 위치에서 어디에 끼어 춤추지도 못하는 영규를 유나와 상희가 발견하여 자신들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그들의 종지부는 어떻게 되는가? 결국 완벽하게 그녀들에게 동화되지 못한 채 현대를 그리워하던 영규는 그녀들에게 살해되고 현대의 도덕율을 넘어선 그녀들을 현대는 현대의 기준으로 벌한다. 바로 이것이 '노랑머리'가 말하려는 바다.

그러나 이러한 메세지가 과연 납득할 만한 것인가? 먼저 유나와 상희는 현대에서 일탈된 인간으로만 그려져서는 안되며, 현대라는 세계에 대한 또다른 대립항을 분명히 표현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추적 60분의 비행청소년 문제나 '나쁜 영화'의 메세지가 더 의미가 있지 이 '노랑머리' 안에 일탈에 대한 어떠한 의미나 신빙성이 있겠는가? 그런 이유로 '노랑머리'가 설정한 세계가 일탈을 넘어선 원시의 바로 인간 근원의 가치의 세계인 듯 하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다. 즉 원시라는 현대에 대립하는 세계에 대한 설정이 단지 sex로만 묘사될 뿐, 너무 피상적이기 때문에 유나와 상희에 대한 이해를 부족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작가 자신의 유나와 상희에 대한 이해 부족을 드러내는 점이다. 사랑보다 sex가 먼저 가능한 원시의 그녀들이 어떻게 영규에게 집착할 수 있겠는가? 집착은 곧 사랑에 대한 소유이며 그 소유에 대한 욕망은 살인으로까지 치닫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살인까지 마다 않는 이 지독한 소유욕은 다분히 자본주의적이며 현대적인 이데올로기이다. 그런데 이런 현대적인 즉 자신의 대립항의 상징을 유나와 상희가 지니고 있다면 대체 그녀들을 통해 이 현대 사회와 대립하는 무엇을 보여주겠다는 것인가? 원시의 인간은 도덕율이 없기 때문에 살인도 밥먹듯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도 사랑하는 인간을...... 유나와 상희의 증오에 찬 표정은 결코 그것이 아니었으며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 인간의 성선설을 우습게 보지마라.

결국 '노랑머리'는 현대와 대립하는 혹은 사회와 대립하는 어떤 것도 설정하지 못한 채 뜬구름 잡는 식으로 섣불리 말하려 했을 뿐이다. 그로써 유나와 상희 역시 그 무엇을 대변하는 인물도 되지 못했으며, 쓸데없이 노랑머리하고 나와 추적 60분 '비행청소년 염색..날로 대담해진다' 코너에서 잠깐 불량스러웠을 뿐인 것이다.



이로써 그녀들의 노랑머리는 현대 사회의 일탈된 자아나 원시의 개인에 대한 상징이 더이상 아니며, 그저 싸가지 없는 젊은 놈 꼬락서니로 전락하고 말았다. 때문에 이처럼 영화의 내용이 '노랑머리'라는 상징을 탄탄히 받쳐 보호하지 못하는 한 이 '노랑머리'는 엄청나게 씹힐 구석이 많은 약점을 보이게 된다. 이 약점 중에 하나와 관련하여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절대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한 장면이 있다. "노랑머리는 내가 표절한거야...."로 시작되는 상희의 회상씬. 그 회상 씬 안에는 피아노를 치고 있는 유나의 전 애인의 뒷 모습, 유나를 쳐다보는 아직 검은 머리의 상희, 그리고 노랑머리를 한 채 전라로 침대에 누워있는 유나의 모습이 나타난다. 상희는 그때 유나의 모습이 너무도 예뻐서 자신도 노랑머리로 염색했다고 했다. 아마 그 장면은 상희가 어떻게 일탈된 세계 혹은 원시의 세계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는지 이미 일탈된 원시의 인간인 유나의 모습을 통해 설명하는 장치로써 기능하는 장면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나는 전라로 원시를 상징하며, 소프트 렌즈를 통해 최대한 아름답고 신비한 모습으로 그려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 장면의 유나가 상희의 말대로, 아니면 감독의 의도대로 그처럼 아름다웠는가? 이 장면이 두고두고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이유는 유나가 너무도 아름답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히려 그 장면에서 미국산 싸구려 에로 영화의 3류 배우들의 자세로, 혹은 이미 기억에서 지워진 헐리웃 글래머 여배우의 표정으로 누워있었다. 노랑머리를 한 채..... (다시 한 번 보라. 공감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상정한 원시의 상징인 우리의 노랑머리는 결국 연출의 상상력 부족으로 깊은 나락으로 빠지고 만다. 미국이라는 나락으로. 어쩌면 이 장면에 관련하여 감독의 sex에 대한,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모든 상상력은 그가 그동안 접하고 경험한 미국의 섹스 상품 안에서 얻어진 것일 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균동이 '맨?'을 만든 이유도 바로 이런 것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파란 눈에 노랑머리를 한 라라공주 인형을 가지고 놀던 우리들에게, '노랑머리'가 극 중에서 그 메세지와 관계된 아무 상징도 되지 못한다면 과연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질 것인가? 감독과 작가는 이 부분에서 너무나 신중하여야 했지만 오히려 그들 역시 이미 미국 문화의 고마운 휘호의 그늘 아래 있었을 뿐이다.




철구 백
2003/01/12 06:17 2003/01/12 06:17

TRACKBACK :: http://chulgoo.com/trackback/352

1  ... 657 658 659 660 661 662 663 664 
BLOG main image
비너스의 불량
불량으로 대동단결
by 철구

공지사항

카테고리

전체 (664)
잡글 (216)
궁상 (157)
영화 (190)
시·소설 (41)
패러디기자협회보 (7)
샤따질 (51)
textcubeDesignMyselfget 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