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너스의 불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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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수

궁상 2009/11/03 13:49 by 철구

서울 시내 풍경을 찍으려고 돌아다닌다. 가을이 좋았는데 청운동 삼거리 모퉁이에 들어선 은행나무 한 그루가 감동적이다. 길 곁으로 심은 가로수 모두 은행나무지만 특히 그 모퉁이 은행 한 그루만 독보적인 노란색을 풍긴다. 사방으로 손을 뻗은 가지들에 가을 오후 햇살이 쏟아지니 무수한 은비늘이 돋았다 사라지고 노랗고 누런 알갱이들이 복작거린다.

낙엽 져 떨어진 은행잎들은 폭신하다. 은행나무는 잎사귀의 수분을 다 앗지 않고 지상으로 떨궈낸다. 물기 머금은 잎을 밟는 느낌은 봄 때를 밟는 감촉과 흡사하다. 자신의 먹이인 물기를 모조리 거두지 않고 버리는 넉넉한 식물이다.

이와는 반대로 가난한 가로수도 있다. 도심 가로수로 흔한 플라타너스는 물기가 부족한지 나무 껍질이 버즘피듯 갈라졌다고 해서 우리말로 버즘나무다. 이 녀석은 낙엽으로 떨구는 그 넓은 잎사귀에서조차 조금의 수분도 남기지 않고 다 빨아 마신다. 물기를 아끼고 아껴 함부로 내버리지 않는 것인데 그래서 플라타너스 낙엽은 바삭거리고 부서진다. 은행나무 낙엽의 폭신한 감촉과는 천지차이다. 은행이 넉넉한 부자라면 플라타너스는 억척맞고 가난한 나무다.

녹사평을 지나 이태원으로 넘어가는 길에는 이 넉넉한 나무와 가난한 나무가 번갈아 심어져 있다. 은행의 노란 낙엽과 플라타너스의 갈색 낙엽이 바닥에 흥건하다. 밟는 감촉도 진기해 봄의 부드러운 때잔디를 밟다가 비 내린 지 오래된 건조한 밭을 걷는 느낌이다. 그래도 플라타너스의 위용은 대단한 것이라서 우듬지 끝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아 은행나무는 플라타너스의 키를 따라잡지 못한다. 나무 둥치도 은행의 세 배 이상이고, 척박한 도심에서 자라기도 은행보다 훨씬 잘 자란다고 한다.

두 나무를 사람 사는 일에 비유하려다가 그 얼마나 유치한 일인가, 눈이 시리게 푸른 가을 하늘이 말해주어 그만둔다. 다시 출장 보따리를 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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