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너스의 불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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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뒷면

시·소설 2010/01/27 01:29 by 철구








목숨 바쳐 사랑한 그녀는 초췌하게 늙어 있었다. 초라한 좌판에 계수나무 꽃을 늘어놓고 있었는데 고작 다섯 송이였다.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 관광객을 상대로 꽃을 팔았다. 향이 강한 꽃으로 알고 있었지만 맹렬한 폭양 아래에서는 소용 없었다. 꽃의 향도, 그녀의 푸른 영혼도 보도블록 아래로 아래로 눌어 붙었다. 계수나무로 유명한 중국 광서성 계림(桂林)이었다.

그녀를 잃은 곳은 경주였고, 그녀의 흔적을 좇아 런던, 바르샤바, 테헤란, 뭄바이, 양곤을 헤맸다. 그때마다 그녀는 피카디리 거리에서 몸을 팔고 있다거나, 타르 사막에서 실종됐다거나, 이슬람 시아파로 개종해 자살폭탄을 몸에 묶었다거나, 미얀마 반군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는 식의 풍문으로만 존재했다. 확인할 수 없었고, 확인할 수 없는 시간이 계속되자 그녀의 풍문은 불어도 그만 안 불어도 그만, 바람이 되었다. 덕분에 나는 오랫동안 잘살았다.

계림의 자랑 양강사호 중 하나인 도화강은 도도하게 8월의 복판을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중국식 꽈배기와 두유를 사들고 물에 발을 담궜다. 그녀의 슬리퍼는 바닥이 해져 있었고 발 뒷꿈치에는 깍지 못한 각질이 퀴퀴했다. 그러나 상관없이 그녀는 명랑하게 발을 퐁당였고 그 물결에 튕긴 한 여름의 햇빛이 내 눈썹 위에서 부서졌다.

"그렉이 쫓고 있어. 애를 버리고 도망쳤거든."

그녀는 꽈배기를 씹으며 말했다. 나는 묵묵히 들었다.

"나는 진화론을 믿지 않아. 그래서 니가 싫어."

그녀는 두유를 들이키며 말했다. 나는 묵묵히 들었다.

"넌 알투디투에 빠졌고 난 로봇 마빈에 빠졌어. 그뿐이야."

그녀는 광주리에 구겨넣은 계화나무 꽃을 꺼내 꽃잎을 땄다. 나는 묵묵히 들었다.

"차라리 기억을 사랑해. 그건 내가 아니니까."

도화강에 그녀의 꽃잎이 흘렀다. 그녀가 딴 잎은 두어 장이었는데 강은 이내 꽃잎이 지천인 연분홍 꽃밭으로 변했다. 그 꽃잎을 따라 도화강 하구에 꽃이 피고, 동지나해에 꽃이 피고, 서해에 꽃이 피고, 한강에 꽃이 피었다. 한강변 고수부지에 앉은 나는 강물 위에 펼쳐지는 계수나무 꽃을 묵묵히 쳐다 보았다. 기억이란 게 다 마찬가지이고 그녀라고 별반 다르지도 않겠지만, 강물 위로 흐벅지게 번지는 꽃잎은 그래도 아름다웠다.

사무실에서 일을 하는데 메신져 창이 울렸다. 바람처럼 그녀의 풍문이 불어왔다.

"걔 있잖아. 중국에서 유료 우주 비행선에 탄대. 달에 간단다. 달."

그날 밤 서울의 달은 훤하디 훤한 보름달이었다. 지구인이 보지 못하는 달의 뒷면에는 아마 계수나무 꽃이 만개할 것이었다.













2010/01/27 01:29 2010/01/27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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