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너스의 불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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뒹굴

궁상 2009/06/16 00:05 by 철구


*
할 일이 세 가지다.

지금 작업하고 있는 다큐를 좋은 퀄리티로 끌어올려야 하고.
스스로 만족할 만한 단편 몇 편을 써내야 하고.
패러디 기사를 주르륵 쏟아내야 한다.

난 멀티가 되지 않는다.



*
쓰고 있는 소설 '도박'의 주인공 '철구'가 되기 힘들다.
시간을 내 자판 앞에 앉으면 난 모든 것을 잃기 직전인 사십대 중년 '철구'가 되어야 한다. 그 참담한 심정이 내 안에서 살아나야 한다. 하지만 난 참담하지 않다. 아직 먹고 살 만하다. '철구'가 아닌 나는 자판 하나 찍지 못하고 하얀 모니터를 쳐다보다가 잠자리에 든다.



*
노무현의 유서를 다시 읽었다. 그는 무척 글을 잘 쓰는 사람이었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화장해라'와 '오래된 생각이다' 사이에는 얼마나 많은 상념과 번뇌가 끼어 있을까? 그는 그 차고 넘칠 상념과 번뇌를 '작은 비석 하나'에 집어 넣었다. 짧고 간결한 문장 하나는 그 뒤에 수많은 여백과 상상의 여지를 감춰 슬픔을 자극한다.

다시 그는, 세상을 떠나면서 세상과 인사하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말은 '안녕'이 아니라 '오래된 생각이다'이다. 그는 작별을 말하지 않음으로 세상에 작별을 말했다. 그에게 작별이란 것은 인사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인사하고 싶지 않은 작별이 어떤 것인지 나는 알 턱이 없는데 그는 그렇게 했다. 그가 세상과 나눈 작별은 인사하지 않는 작별이었다. 인사를 하지 않는 것으로 그가 느끼는 세상과의 작별을 그는 말했다. 결국 말하지 않고 말한 셈이다. 쓰지 않고 쓴 셈이다.

쓰지 않고 쓰는 글. 그는 무척 글을 잘 쓰는 사람이었다.



*
되든 안 되든 써야 하는 건 맞다. 커텐이 쳐진 창 밖으로는 밤이 짙게 내려 있을 터인데 내가 사는 동네의 밤은 작은 기척에도 소스라친다. 취객의 비틀대는 발소리,  동네 개 짖는 소리, 옆집 아이의 울음 소리에도 이 밤은 놀라 움츠리며 그 소리를 다 내게 전해준다. 거기에 보태 내가 두드려대는 자판 소리도 밤을 움찔대게 만드는데.

스스로 묻는다. 나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는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나는 나에게 질문이 있었다. 이를 테면 '행복은 무엇인가'와 같은 엉성한 것부터 '나는 그녀를 사랑하는가'와 같은 개인적인 것을 비롯해 '구조와 의식은 어떻게 관계하는가' 같은 철학적인 것까지 다양한 종류였다. 길게는 한 질문을 몇 년씩 껴안고 가기도 했고, 더러 해결하기도 더러 묻어버리기도 했는데.

다시 묻는다. 지금 나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는가?

최근 '반독재'로 대변되는 개혁진영과 '반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진보진영에 대해 조금 질문하고 조금 답변하다 금세 TV를 켜고 꺄르르거리다가 술집에 앉아 있다. 들춰보는 책은 대부분이 소설책으로 바뀐 지 오래고 그조차도 게으르다. 내가 사는 동네의 밤은 여전히 예민한데 나는 그 밤에 앉아 둔하게 몸을 굴리고 있다. 건너집 마당의 감나무가 한 나절 뙤약볕을 이기고 몰아 쉬는 한숨이 이 밤을 놀래키고, 수많은 불면이 뒤척이는 소리가 이 밤을 부산하게 할 것이지만 내 둔한 귀에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데.

이 밤. 나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는가?











2009/06/16 00:05 2009/06/16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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