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너스의 불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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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1

시·소설 2009/08/01 02:57 by 철구

1.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이제야 돌이켜 쓴다.


2.
그는 하얀 피부에 긴 손가락을 가지고 있었다. 손 허리뼈는 가늘게 불거졌고 푸른 정맥이 차갑게 손등을 지났다. 비누 냄새가 옅게 풍겼는데 그 비누조차 짙은 하얀 색일 것 같았다. 그가 찾는 물건은 언제나 던힐 담배였다. 이천오백 원을 건네주는 그의 손끝이 내 손바닥에 닿을 때 그의 손은 존재감이 없었다. 내 손바닥을 통과해 사라져버릴 것 같은 손은 금세 가게의 미닫이 샷시문을 닫고 멀어졌다. 창백하고 길고 차가운 그의 손샅에 다시 하얗고 가는 담배가 끼워져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는 삼 일에 두 번 꼴로 담배를 사 갔고 나는 그 삼 일에 두 번이 숨 가빴다. 존재감 없는 그의 손에 청진슈퍼 여사장인 나는 사랑에 빠졌다.

남편의 손은 건강했다. 태양에 잘 익은 구릿빛이 단단했다. 남편은 그 손으로 TV 리모컨을 찾았다. 채널이 골프 중계에 맞춰졌다.
"위성미는 어프로치가 죽인다니까."
필드는커녕 골프채도 잡아본 적 없는 남편은 컴퓨터 대리점을 하고 있었는데 한참 온라인 골프 게임에 빠져 있었다.
"공 치러 필리핀이나 태국에 많이 가지만 진짜 재미는 제주도야. 바람이 하도 세게 불어서 공이 어디로 날아갈지 몰라."
남편은 대학교 때 이후로 제주도도 가본 적이 없었다. 남편은 골프를 보고 나는 설거지를 하고, 남편은 골프를 보고 나는 쓰레기를 내놓고, 남편은 골프를 보고 나는 빨래를 정리했다. 남편은 골프를 즐길 수 있을 만큼 돈을 벌길 원했지만 지금은 온라인으로 골프를 치고 TV로 골프를 보고 있다. 남편의 골프는 덧없어서 무해했지만 그의 삶과 비벼진 나는 그의 골프가 서글펐다.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웠을 때 거실 TV가 조용해졌다. 잠시 후 남편의 구릿빛 손이 나의 옷섶으로 들어왔다. 존재감이 너무나 확실한 그의 손에 나는 눈을 감았다. 내가 좋은 곳 또는 싫은 곳을 가리지 않고 남편의 손은 분주히 오가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묵묵히 남편을 몸 안에 들였는데 생각하고 보니 그날 우리 부부는 한 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다. 스탠드를 끄고 나는 존재감 없는 또 다른 손을 생각했다. 나의 귀밑과 등골과 골반과 엉덩이를 무차별로 향하는 그 손은 나의 살에 닿아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살을 투과해 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내 안의 체액과 삼투됐고 부서졌다.
남편은 옆에서 코를 골고 있었다.

청진슈퍼는 남편의 이름 청수와 내 이름 경진의 앞 글자와 뒷 글자를 따서 만들었다. 결혼 전 작은 회사 홍보부 생활을 삼 년 남짓 한 것이 사회생활의 전부인 나는 먹고픈 것 먹고, 입고픈 것 입고 그저 모자람 없이 살 수 있을 정도의 결혼을 바랐다. 아버지는 무역회사 경비직이었는데 살림이 빠뜻했다. 나라고 거창하고 화려한 꿈이 없었을까마는 우선은 그 빠뜻함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박했다. 남편은 그 조건에 걸맞아 보였다. IT 벤쳐기업을 운영한다는 남편은 몇번의 데이트 끝에 중형차를 몰고 집에 찾아왔고 부모님은 무리해 나를 결혼시켰다. 나는 남편을 사랑하는 것 같았다. 결혼 2년 만에 남편의 벤쳐기업은 운영하던 인터넷 사이트 몇 개를 정리하는 것으로 결국 변두리 컴퓨터 대리점이 되었다. 그리고 그 근처 슈퍼마켓이 매물로 나왔을 때 남편은 나에게도 일을 하는 게 어떠냐고 물어왔다. 빚을 껴서 우리 부부는 슈퍼를 인수했다.

남편은 아르바이트생 한 명을 끼고 컴퓨터를 수리하거나 팔았다. 수리비나 제품 가격은 손님이 누구냐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는데 컴퓨터를 모르는 노인이나 여성들일 경우 심하게 값을 후려쳤다. 그 소문이 주변에 퍼져 장사는 신통찮았지만 남편은 무덤덤했다. 인건비를 줄인다고 아르바이트생은 여섯 시에 퇴근시켰고 그가 가면 남편도 덩달아 퇴근했다. 하지만 내가 있는 청진슈퍼로 오지는 않았다. 나는 혼자 들어앉아 장사를 했다. 드르륵 가게 샷시문이 열리는 소리는 손님들마다 다 달랐는데 소리가 가볍고 급할수록 몇천 원어치 손님인 경우가 많았다. 가끔은 문 열리는 소리를 뻔히 들으면서도 넋빠진 사람처럼 반응할 수 없어서 손님을 놓치거나 물건을 도둑맞기도 했다. 가게 문이 열릴 때마다 내 늑골 안 어느 먼 곳에 있는 영혼의 뚜껑이 열리고, 내 영혼이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수소 풍선 다발 같은 것이어서 뚜껑이 열린 사이 하나둘 씩 새어나가는 듯했다. 그 풍선들은 여전히 창공을 향해 떠오르고 있을까, 아니면 이미 터져버렸을까. 그즈음 내 생활 중에 모자라는 것이 무엇인지 자문했던 것 같다. 딱히 못 먹는 것도 못 입는 것도 없으니 모자라는 생활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결혼 전 바라던 생활이 이것이었는지는 답할 수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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