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너스의 불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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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

잡글 2010/07/17 05:23 by 철구



많은 학생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열심히 스팩 쌓아서 좋은 직장 얻고 돈 많이 벌어서 넉넉하고 여유롭게 살겠다고요.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이런 거지요. 능력 있는 전문직으로 인정받아 주말에는 유명 공연도 즐기고, 사랑하는 이를 위해 이벤트도 벌여주고, 세계 여러나라를 여행하며 다른 문화도 체험하면서 여유롭게 사는 삶. 그것이 행복이고 그 행복을 위해 지금 나는 노력하고 있다고요. 옳습니다. 좋아요. 그런데 한 가지 덧붙여 이렇게도 생각합니다. 그런 삶의 태도는 내가 판단해서 내가 선택한 것이라고요. 그러니까 내가 가진 그런 '삶의 태도'나 '행복의 가치'는 의심할 여지없이 자신의 것이라고요. 다시 말하면 올곧이 자신이 자기 생각의 주체라고 믿는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갖는 그런 생각의 주체는 당신이 아닐 가능성이 더 높다, 당신의 생각은 당신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당신 외부의 무엇인가로부터 주어진 것일 수 있다, 그걸 당신은 올곧이 당신의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라고 보는 것이죠.

물론 '당신'이라는 표현에는 '저'도 포함돼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우리'라는 표현을 써 보죠. 과연 우리는 우리 생각의 주체일까요? 우리가 갖는 삶의 태도, 가치관, 세계관과 같은 것들은 올곧이 우리 스스로가 만든 것일까요?

우리는 생각을 합니다. 뭘로 생각을 할까요? 언어입니다. 특히 인간과 같은 고도의 사고 능력은 언어 없이는 불가능하지요. '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라는 의미를 언어 없이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요? 사고 능력을 인간의 특징으로 삼아 인간을 호모 사피엔스라고 부르죠. 하지만 사고는 언어 없이 이뤄질 수 없다는 점까지 생각하면 인간은 호모 로퀜스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현대 과학자들은 언어 없이는 사고가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어쩌면 인간이 동물과 차별되는 본질적인 특징인 거죠. 인간이 언어를 습득할 수 있는 특정 기간이 있다고도 합니다. 대게 3~5세라고 하는데요. 그래서인지 그 시기를 인간 사회가 아닌 곳에서 보낸 '야생의 아이들', 그러니까 개가 길렀다든가, 원숭이가 길렀다든가 해서 언어습득 시기에 언어를 배우지 못한 아이들은 정상적인 성인으로 자라나지 못한다고 합니다. 아무튼 중요한 점은 인간은 언어를 통해 사고한다는 사실이죠.

그렇다면 언어는 사고의 도구이기만 한 걸까요? 우리는 눈, 코, 귀, 혀, 피부를 통해 외부세계를 감각합니다. 멀리 참새 다섯 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봤다 칩시다. 날아가는 참새 다섯 마리를 눈으로 지각한 것과 그 지각된 상황의 의미를 머리로 파악하는 것은 다르지요. 그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참새' '다섯' '난다'라는 언어가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만 보면 언어가 사고의 도구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지도 몰라요. 언어에 대한 흔한 정의 중 하나가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다'라는 거죠. '어머니'를 '니어머', '머니어', '니머어' 등으로 부르지 않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나를 낳아준 여자'를 '어머니'라고 부르기로 그 사회에서 약속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언어에는 너무나 자연스럽게도 한 사회의 가치가 묻어 있기 마련입니다.

너무 저렴한 예를 드는 것 같은데 딱히 떠오르는 게 없으니까 어쩔 수 없네요. 백프로 이렇다는 게 아니고 그냥 예일 뿐인데 "그녀는 순진한 여자였다"라는 문장에서 그녀는 어떤 여자일 것 같나요?

'순진하다'라는 단어의 뜻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꾸밈없고 순박하다란 뜻과 세상물정 모르고 어수룩하다라는 뜻이죠. 그런데 전 요즘 쓰이는 '순진하다'라는 표현에는 전자의 의미는 거의 사라지고 후자의 의미가 강해진 것 같아요. 전자의 의미를 살릴 때는 '순수하다'라는 표현을 쓰는 게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거죠. "그녀는 순진한 여자였다", "그녀는 순수한 여자였다". 어감의 차이가 있지 않나요?

그런데 '순진하다'라는 단어가 후자의 의미로 쓰일 때도 전자가 가진 의미가 아예 사라지는 건 아니에요. 전자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후자의 의미가 성립되는 것이죠. 꾸밈없고 순박하기 때문에 세상물정 모르고 어수룩하달까요? 꾸밈없고 순박하다는 뜻에는 세상을 살기 어렵다는 뜻이 섞여있다는 거지요. 만약 제 말이 맞다면 왜 그렇게 됐을까요? '순진하다'라는 단어는 변함없는데 의미는 왜 후자가 강해지는 거죠? 혹시 꾸밈없고 순박한 것으로는 더 이상 살아가기 어려운 세상으로 사회가 변하고 있는 걸까요?

요즘 '쿨하다'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그런데 이 말을 쓰는 상황을 보면 한국말로 무조건 '멋있다'로 번역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외모를 가르켜 '쿨하다'고 할 때는 어떤 스타일이 있는 것 같구요, 태도를 가르켜 '쿨하다'고 할 때 역시 특정한 태도가 있는 것 같아요. 일개 변두리 떠벌이가 그냥 밤에 생각나서 끄적거리는 글이니 '쿨하다'의 의미를 상황에 맞춰서 분석할 재주는 없고요. 만약 그렇다면 이 역시 '쿨하다'고 표현되는 특한 '멋있는 유형'이 존재한다는 얘기인데요. 한국말인 '멋있다'라는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유형은 대체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 그게 궁금하다는 것이죠. '쿨하다'는 표현을 쓰기 이전의 한국 사람들이 쓰던 '멋있다'라는 단어에는 포함되지 않는 새로운 그 '멋있음'은 어디서 왔을까요?

그러니까 사실 이건 푸코가 한 얘기예요. 언어, 그 언어로 이루어진 문장, 문장으로 이루어진 지식, 곧 담론에 따라 똑같은 사실이 달라지더라. 17세기. 갑자기 '광인'이라고 잡아가두기 시작해서 파리 광인 수용소에 파리 시민 1%에 해당하는 인원을 가두더라. 그런데 그 사람들이 정말 다 순수한 정신병자들이었냐? 거지나 노숙자 등 일하지 않은 사람들도 다 가뒀더라. 왜냐면 노동하지 않는 게 병으로 취급받는 시대였으니까. 그러다가 노동력이 부족한 시대로 넘어가자 이 사람들을 풀어주더라. 똑같이 정신병자로 진단받고 분류되던 사람들인데 왜 시대에 따라 다르냐? 그건 시대에 따른 담론의 틀, 담론의 구조가 있기 때문이다. 그걸 푸코는 '에피스테메'라고 했지요.

만약 '에피스테메'라는 게 있다면 그 기본틀은 '담론'까지 갈 것도 없이 '언어' 그 자체가 아닐까 생각한다는 거예요. 처음 얘기로 돌아가서, 언어는 사고의 도구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우리가 가진 오감을 통해 외부 세계를 지각합니다. 그 지각된 경험은 축적돼서 '언어'로 '사고'됩니다. 그런데 이 과정을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지각된 경험은 '언어로 필터링' 돼서 '사고'되는 게 아닐까요? 아니 어쩌면 지각과 언어의 차이가 너무 가까워져서 언어로 필터링된 지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착각할 수준이에요. 티없이 맑고 깨끗한 여자를 보고 참 순진한 여자라고 생각하는 순간 세상살기 힘들겠구나까지 같이 사고하게 된달까요? 우리가 언어로 사고하는 한, 그리고 그 언어가 어떤 사회적/시대적 가치를 담고 있는 한 우리의 사고는 쉽게 그 사회적/시대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거지요.

그런데 이 긴 얘기를 하는 이유는 미디어 때문입니다. 저는 미디어가 우리 외부 세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환경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해요. 예전 우리 외부 세계는 앞산과 뒷산, 윗마을와 아랫마을, 김첨지네 삼십 마지기 논과 물레방앗간, 나라님과 사또 정도였는데 현재 우리의 외부 세계는 여기에 비할 수 없게 광대해졌지요. 대한민국은 물론이요 미국과 영국과 오바마와 무리뉴와 이라크와 아프카니스탄과 북한과 헐리웃과 뉴욕과 조지 크루니와 페리스 힐튼과 추신수와 세부와 푸켓과 팔레스타인과 그 거시기 뭐냐 이란 대통령 아흐마디어쩌구와 화성과 목성과 태양까지요. 모두 미디어 덕분입니다.

미디어라 고 하면 출판, 영화, 신문, TV, 라디오, 인터넷 등등등이겠지요.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대부분의 정보를 이곳에서 얻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미디어가 제공하는 정보는 기존의 우리가 오감으로 받아들이던 정보와는 질적으로 다른 정보라는 게 문제입니다. 김첨지네 논이 쌀이 잘 자란다는 정보는 모내기부터 추수날까지 못해도 5~6개월은 지켜봐야 알 수 있는 정보입니다. 그런데 이 정보를 미디어가 전달한다고 칩시다. 드라마라고 쳐요. 모내기 하는 날 한 컷, 누렇게 풍년 든 논 한 컷. 딱 두 컷이면 끝납니다. 뉴스라고 쳐요. "꽈릿골 김첨지네 논에 풍년 들었습니다" 스튜디오 멘트 한 줄이면 끝납니다. 무슨 말이냐면 미디어가 주는 정보는 기본적으로 모두 다 언어의 형식을 빌린 정보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부인할 수 없어요. 미디어를 통해 경험을 하고, 그 경험으로 세상을 구성하는 현대인들은 기본적으로 누군가의 언어를 통해 자신을 구성하고 있다는 이야기지요.

좀 더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기존의 우리는 큰 덩치에 뿔이 있고 거죽이 노란 네 발 짐승을 우리 눈으로 보고 '소'라고 불렀다면 현대의 우리는 그저 '소'라는 단어를 우리 눈으로 읽고 '소'라고 부르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요. 그리고 그 '소'라는 단어를 우리보고 읽으라고 내민 애들이 바로 미디어인 것이지요.

맞아요. 매트릭스입니다. 우리는 매트릭스 안에 있는 것일 수 있죠. 네오가 보았던 아름다운 호수와 공원이 사실은 아래로 흘러내리는 이진수에 불과했던 것처럼 우리가 머릿속에서 사유하는 많은 것들이 미디어가 던져준 언어의 조합들일 뿐일 수 있어요. 언어로 사고한다는 것 자체가 언어로 필터링 된 세계를 받아들인다는 것인데 미디어에 포위된 현대인의 주변에는 애초부터 언어로 필터링된 세계만이 존재한다는 것이죠.

아무튼 제 문제의식의 전제는 이런 거예요. 너의 생각은 너의 것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미디어에 노출된 대도시에 사는 현대인은 기존의 인류가 살았던 환경과 전혀 다른 환경에 살고 있다는 것.

생각이 이만큼 오다보니 저는 현대 사회의 연예인이 매우 독특한 위치를 점하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기존 연예인의 개념만으로는 해석하기 어려운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죠. 마치 그리스/로마 신화의 신적인 역할이라고 할까요? 다음 기회가 된다면 그 얘기로 이어가볼까 합니다. 제목은 '신이 돼버린 연예인'.

학생으로 시작해서 연예인으로 끝나는 이상한 글이네요. 아마 많은 이들이 꿈꾸는 '부유한 삶'이라는 것이 결국 '소비하는 삶'인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소비'를 꿈꿀수록 오히려 진짜 뒤에서 미소짓고 있을 누군가는 따로 있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하려다 여기까지 온 것 같네요. 끗.









2010/07/17 05:23 2010/07/17 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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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엽기민원의 생각

    Tracked from yupmin's me2DAY  삭제

    출근할때 지나쳐간 한 대학, 방학임에도 계절학기를 듣기 위해(다른 말로 조기졸업해 스펙쌓기를 하는) 구름처럼 등교하는 대학생 무리들을 보며.. '너의 생각은 너의 것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철구님의 좋은글 하나 '착각'

    2010/07/17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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