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너스의 불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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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찾기'라는 이름의 이 코너는 숨겨진 영화, 제대로 된 가치평가를 받지 못한 영화를 다시 찾아내는 자리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역으로 너무 과대포장된 영화를 까내리는 작업을 하려 한다.  



그 작업의 대상은 '아름다운 시절'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시절'이 형편 없는 영화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단지 너무 과대포장 되어 있다는 사실, 예술 영화하면 떠올릴 정도로 우리 영화를 대표하는 영화처럼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사실에 많은 불만이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이 벌어진 이유는 우리 영화에 팽배한 상업주의가 무늬만 진지한 영화에라도 깜짝 놀라게끔 우리 주위에 만연한 탓일 것이다. 각설하고 '아름다운 시절'은 결코 그다지 새로운 영화가 아니라는 점을 뜯어보자.



'아름다운 시절'의 특징을 살펴보자.




1. 롱테이크
2. 롱샷-차라리 익스트림 롱샷에 가까운 먼 거리
3. 철저하게 고정된 카메라
4. 리얼리티를 살려내는 사운드
5. 탐미적인 화면 구성



먼저 1.2.3 번의 특징으로 구축하는 '아름다운 시절'의 효과를 보자.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듯이 철저한 객관성이다. 한 화면 안에서 의도적으로 감독이 강조하고 싶은 것을 강조하고 보여주기 싫은 것을 감추는 게 아니라 어떤 것이든지 관객이 원한다면 맘껏 볼 수 있게 열어둔 것이며 따라서 화면의 전면과 후면 모두 의도적인 피사체의 배치가 이루어진 상태에서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러한 양식은 텍스트에 대한 주체와 객체의 자리가 바뀌어 버린 현대 예술인 '영화'의 직접성 또는 관객에게 전하는 폭압에 대한 반대이다. 영화에서 편집이 이루어지면서 특히 그리피스에 의해 쇼트 분할이 이루어지고 그러한 쇼트가 편집됨에 의해 관객의 감정을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영화는 관객에게 일방적인 의사소통을 요구했다. 장면 내에서 바뀌는 장면 배경들, 한 장면 내에서 달라지는 장면 거리들, 그리고 앵글들, 관점 혹은 시점들을 감독이 조작할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 자본주의와 함께 태어난 현대적인 매체의 강력한 매력이었으며 19세기까지 지속되어온 예술의 전통성을 전복하는 일이였다. 이러한 새로운 매체의 양식을 처음 대한 관객들은 롤러코스터를 탄 듯 영화가 전하는 메세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하지만 관객을 객체로, 영화를 주체로 만드는 이러한 양식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리피스는 클로즈업을 너무 적게 썼다고 그를 비난하면서 더 많은 클로즈업을 통해 한 장면 내에서도 감독이 강조하는 피사체로 수시로 관객을 이끌었던 소비에트 몽타쥬주의자들에게 떨어진 이데올로기의 선전물이란 맹렬한 비난은 그렇게 관객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는 일방적인 양식이 얼마나 그릇되었던가를 보여주는 일이다.



'아름다운 시절'이 관객에게 전하려는 객관성과 자유로움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지독한 롱테이크와 롱샷만이 관객에게 아무 것도 강요하지 않는 영화일 수 있다는 그 점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시절'이 배려하는 객관성, 혹은 자유로운 관객을 만들려는 시도는 몇 가지 장치에 의해 더욱 심하게 이루어진다.  



그 하나는 특징 3-고정된 카메라이다. 예를 들어 PAN(카메라의 수평 회전)을 사용한 카메라 워킹은 피사체를 순차적으로 보여주게 된다. 서로 상반되는 피사체가 이처럼 순차적으로 보여지게 된다면 우리는 그 피사체의 보여지는 순서에 따라 몽타쥬 효과를 얻게 될 것이다.  



칼을 앞세워 살기등등한 한 인물의 커트와 공포에 질려 무서움에 벌벌 떠는 한 인물의 커트를 편집해서 붙이는 것과 각 인물을 PAN으로 순서대로 보여주는 것과 같은 효과를 주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역시 관객의 객관성을 해치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편집 혹은 팬은 두 인물 중 나중에 등장하는 인물 그러니까 여기서는 공포에 질린 인물을 의도적으로 강조하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며 그 상반된 이미지의 피사체는 따라서 이미지 충돌에 의한 몽타쥬 효과를 불러 오게 되겠지만 진정으로 자유로운 관객이라면 두 인물 중 누구를 보건 간에 그것은 전적으로 관객의 몫에 맡겨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아름다운 시절'은 철저하게 고정된 카메라를 고수하며 단 한번도 카메라 워킹을 사용하지 않았다.



두번째는 특징 2-일반적인 롱샷보다 더 먼 거리를 유지한다는 점이다. 무언가를 의도적으로 강조하지 않기 위해서는 롱샷이 효과적이다. 카메라와 피사체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카메라가 포착할 수 있는 피사체의 양 또는 정보의 양은 좁아지고 관객은 하나의 피사체에만 집중하게 된다. 때문에 관객은 어쩔 수 없이 한 가지만 볼 수 밖에 없어지는 셈이다. 그러나 롱샷을 사용할 경우 관객은 다양한 정보, 다양한 피사체를 볼 수 있어 무엇을 보건간에 그것은 관객의 자유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롱샷에서도 관객은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화면 내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이 움직임 혹은 인물의 행동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움직임을 수반하는 피사체가 화면 내에 등장하는 경우에는 관객의 시선이 그 피사체로 쏠리게 된다. 그렇다면 이 역시 자유로운 관객을 만들어 줄 수 없다.



그러한 이유로 '아름다운 시절'은 롱샷보다 더 먼 거리를 유지하려 한다. 그렇다면 화면 내 움직임은 덜 두드러져 관객의 시선 집중을 비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인물의 움직임을 '점의 움직임'으로 만들려 했다는 연출 의도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사실 몇 가지 부분-고정된 카메라와 롱샷보다 더 먼거리-에서 더욱 강화되긴 했지만 이러한 양식의 미학은 편집에 의해 현실을 조작하길 거부했던 바쟁의 유물이다. 그리고 그가 화면 안의 리얼리티를 살려내기 위한 미장센을 강조했다는 점까지 본다면 '아름다운 시절'이 너무 집중한 나머지 탐미적으로까지 보이는 미장센은 그의 미학을 많은 부분 차용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그의 미학은 이제 유물이 되어버렸다. 그를 넘어서는 좀 더 다양하고 진보적인 미학적 논의가 다채롭게 실험되고 소멸하고 등장해 가는 시대에 다시 그를 붙들어 잡는 것은 어쩌면 시대착오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름다운 시절'이 추구하려는 '화면 안에서 자유로운 관객'이란 이미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진작 말해 버린 것이다.  



화면의 전면과 후면에 모두 촛점을 맞추어 관객이 자유롭게 피사체를 선택하게끔 한다해도 일단 관객이 집중하는 것은 원근에 의해 상대적으로 크기가 큰 전면의 피사체이다. 설령 같은 크기의 피사체들만이 놓여 있다고 하더라도 움직임이 있는 피사체에 먼저 관객의 시선은 집중된다. 아무리 그 움직임이 작게끔 먼 거리에서 포착하더라도 말이다. 따라서 편집하지 않고 롱샷과 롱테이크를 쓴다 하더라도 '자유로운 관객'은 만들 수 없다.



카메라 워킹을 사용하지 않는 고정된 카메라라 하더라도 관객이 화면을 보는 순서는 화면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진행된다. 때문에 한 화면 안에서도 얼마든지 관객은 몽타쥬 효과를 얻을 수 있으며 카메라 워킹이 없는 스틸 사진에서도 우리는 그런 예를 허다하게 발견할 수 있다. 화면의 왼쪽에 좀 더 가까이 위치해서 울고 있는 전쟁 고아와 화면 오른쪽 뒤로 펼쳐진 즐비한 주검들과 같은 르뽀 사진들은 모두 이 사실을 증명하는 예이다. 따라서 고정된 카메라 역시 '자유로운 관객'을 만들 수 없다.



영화를 보면서 눈을 감을 수 있는 자유까지 허락한다는 그들의 주장은 그런 이유로 별로 신빙성이 없다. 그들의 말처럼 어느 누가 영화를 보면서 눈을 감고 싶겠는가?



더군다나 탐미적인 미장센은 현실을 의도적으로 조작한 결과이다. 의도적으로 조작하진 않았더라도 의도적으로 카메라를 위치한 결과가 되는 셈이다. 진정한 현실은 아무리 현실을 그럴싸하게 만들어 내는 화면 구성이라도 조작되지 않은 현실이여야 한다. 도그마 95의 순수의 서약 중에서 '모든 촬영은 로케 촬영이어야 하며 어떠한 소도구도 사용할 수 없다'는 항목은 바로 이러한 조작에 대한 거부이다.



때문에 특징 3의 리얼리티를 살려낸 사운드-소리가 잘 들리건 안 들리건 상관하지 않고 사운드는 카메라와 피사체의 거리에 따라 조정된다. 따라서 먼거리에서 들려오는 사운드가 잘 들릴 턱이 없으며 대사를 잘 들리게 하기 위해 특별히 또박또박한 발성을 요구하지 않는다-가 전하려는 리얼리티의 미학은 이로써 이미 어긋나 버렸다.



따라서 '아름다운 시절'이 정녕 자유로운 관객을 위한 영화였다면 영화를 보고난 사람들이 느낀 바는 전혀 다른 내용이어야 한다. 결국 '아름다운 시절' 역시 자유로운 관객이란 것은 이상에 불과하다는 지난 논쟁을 답습하는 영화일 뿐인 것이다.  



이미 현대 영화는 이와 같은 양식적인 선호를 뛰어 넘어가고 있는지 오래다. 사실주의와 형식주의에 대한 논쟁 역시 막을 내렸으며 '소비에트 몽타쥬는 형식주의이면서 다큐멘터리이고 바쟁 미학은 리얼리즘에 대한 형식주의'라는 고다르의 말은 바쟁 이후 영화들이 몸소 실천하여 증명하고 있다. 때문에 문학적인 뛰어남을 차치한다면 현대 영화는 테오 앙겔로폴로스나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들보다 더 앞서가고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러한 예를 우리는 홍상수의 '강원도의 힘'이나 박철수의 '가족 시네마' 혹은 장선우의 '나쁜 영화' '거짓말'에서 만나고 있는지 모른다. 완벽한 리얼리티 또는 완벽하게 자유로운 관객을 위해 나아가려는 홍상수의 시도나 문학의 전통에서 오는 리얼리티, 허구의 리얼리티를 떠나 영화라는 매체가 지니는 리얼리티를 위해 나아가는 박철수와 장선우의 영화들은 때문에 이광모의 어설픈 미학보다는 백배는 더 훌륭하다.



그러나 이처럼 새롭고 진보적이며 앞서가는 작품들을 영화제나 영평가들은 주목해 주지 않는다. 영원히 우리는 다른 나라의 유물들을 쫓아갈 수 밖에 없게끔 제 살 파먹기만 일삼는 중이다. 외국에서는 이미 폐기처분한 물건을 우리가 새롭게 만들었다고 해서 그처럼 호들갑 떨 필요는 없지 않은가!!  



철구 백
2003/01/12 06:33 2003/01/12 0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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