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너스의 불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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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 한 작품만을 가지고 그 작품의 감독을 평가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어불성설이며 싸가지 몰수한 택도 없는 짓거리다. 그런데도 그런 짓거리를 하려드는 '구멍' 식구들은 때문에 싸가지 몰수한 넘뇬들이다. '구멍' 식구들이 이창동에게 몰두하고 프로포즈를 날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름 아닌 '박하사탕' 때문이며, 아직 보지도 못한 채 전해 듣기만 했을 뿐인 '박하사탕'에 대한 수많은 찬사 때문이 아니더냐! 결국 사탕발림에 꼬여 스스로의 생각은 집어 던진 채 떡고물이나 주워먹으려고 군침흘리는 꼴이 된 것이다. 그러나, 비유띠 벗뜨. 아직 보지도 못한 영화를 사람들이 칭찬하니까 줏대없이 쫓아간다고만 여기지 말아달라. 어찌 됐건 이야기꺼리가 될 수 있는 영화가 나타났다는 것은 기쁜 일이며 사람들이 모두 칭찬했다고 우리까지 무작정 칭찬하지는 않을 예정이니까.. 그래서 이제 다룰 '초록물고기'에 대한 얘기도 나름대로 마음을 비운 후 뒤집어 보고 제껴 보고 홀딱 벗겨 본 다음 (슬며시 올라타 보기도 할까?) 그간에 이 영화에게 쏟아 부은 풍성한 칭찬과는 멀찍이 떨어져서 나불거리려 한다.  

# 내가 너무나도 무식한 관계로 글읽기를 싫어하여 '초록물고기'에 대한 평을 보지 못한 것일까? 아님 그렇게도 극찬해 마지않던 '초록물고기'에 대한 평이 본디부터 그처럼 없었던 것일까? 이점에선 난 아직도 우리네 영평가란 직함은 어딘가에서 고스톱 쳐 따먹은 직함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영평가들은 짜고 치는 고스톱에 그렇게 능숙한 모양이다. 특히 개봉영화에 대한 열글자짜리 평으로 짜고 치는 고스톱...

한편, '초록물고기'에 대한 그나마 있는 평 중에서 그래도 가장 눈에 많이 띄는 단어는 '리얼리즘'이다. 그러나 나는 이 리얼리즘이 눈에 자꾸 거슬린다. 과연 영화에서 '리얼리즘'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리얼리즘에 대한 수많은 논의가 아직도 미종결된 상태에서 '초록물고기'를 한국형 리얼리즘이라 규정하는 그 논거는 또한 무엇인가? 그 형식에서 '초록물고기'보다 더 사실적인 영화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하 돼지퐁)'이 있었지만 '돼지퐁'을 그 누구도 한국형 리얼리즘이라 부르지 않았고 리얼리즘이란 용어도 '초록물고기'에다 붙여준 것처럼 그렇게 많이 붙여주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꼭 형식에서의 리얼리즘이 리얼리즘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란 이야기이며 영화에서의 리얼리즘이란 자기반영적 텍스트, 다시 말해 제작의 흔적 혹은 생산 과정의 모습이 제거되지 않은 영화에만 통한다는 주장에 따라 어쩌면 '돼지퐁'의 객관적 거리가 주는 사실성은 오히려 리얼리즘이 아니란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초록물고기'를 칭하는 한국형 리얼리즘이란 무엇인가? 19세기 낭만주의의 로망스에 반해 나타난 고전적 리얼리즘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그러한 리얼리즘 역시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분산되어 여러가지 모습의 논의를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만약 그러한 리얼리즘이라면 21세기를 눈앞에 바라보는 지금 시점에서 그다지 긍정적인 칭찬은 아닌 듯 싶다. 더군다나 그러한 리얼리즘 앞에 붙어 있는 '한국형'이란 또 어떤 것인가? 한국 무성 영화 시절을 거쳐 '오발탄'을 관통해 90년대까지 흐르는 면면한 무언가가 '초록물고기' 안에 있단 말인가?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발굴하고 살려내야 하며 우리 영화의 또 하나의 경쟁력으로 개발해 내야만 한다. 왜 영평가들은 자기네들끼리만 쑥덕거리고 우리에게는 말해주지 않는 것인가! 우리가 멍청하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것인가 아니면 밑천 떨어져서 장사 못해 먹을까봐 지발 저리고 있는 중인가! 제발 설명을 해달라. '초록물고기'에서 엿보이는 리얼리즘은 대체 어떤 것이며 '한국형'이란 또 어떤 것인지..절라 궁금해 미치겠다. 조또, 어딘가 짱 박혀서 대가리 박고 고스톱만 치지 말고.

# 이런 이유로 나는 '초록물고기'에서 우리 영화의 어떤 대안적인 모습을 찾았다거나 하진 못했다. 아직 터무니없이 공력이 부족한 관계로 아마 내가 놓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다지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 한 영화과 교수가 이런 말을 하더라. 우리 나라 영화 언어의 경천동지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영화가 세 개가 있단다. (아,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우리도 우리의 목소리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너무도 반가운 일이다. 이렇듯 한편에서는 우리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그럼으로써 살아남기 위해 피땀 흘리는 노력을 하는데 또 한편에서는 일신의 안위를 위해 뻔뻔스럽게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헐리우드 언어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내 영화에서 의식적으로 헐리우드를 흉내내고 있다."라고... 나쁜 넘. 눈깔에 스팀들어오면 이름도 확 까발겨 버릴라) 그리고 그 영화는 바로 '돼지퐁' '8월의 크리스마스' '초록물고기'라고. 그런데 그런 와중에서, 그 셋 중 가장 훌륭한 대안으로 뽑히는 영화가 바로 '초록물고기'란다.  

그렇다. 나는 바로 이런 평을 원했다. 우리의 영화를 가치매김하여 제시하는 것. 그 영화가 영화사 속에서 또는 급변하는 영화 환경 속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져야 하며 그 이유는 또 무엇인가 밝혀내는 것. 그럼으로써 결론적으로 그 영화의 의미를 파악해내는 것. 하지만 아쉽게도 그 얘기를 전해들은 장소가 시간에 구애받는 세미나장이었고 때문에 그 교수는 '초록물고기'가 어떤 이유로 가장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있는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나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마치 영화제목 같지?) 왜 '초록물고기'인가를 고민했지만 전언한대로 너무나도 공력이 미미한 탓에 딱 집어 밝혀 낼만한 이유를 얻지 못했다. 세 작품 중 대상과의 객관적 거리가 가장 가까운 영화가 '초록물고기'이며 극적 재미가 가장 풍부한 영화 역시 '초록물고기'이다. 때문에 '초록물고기'는 풍부한 극적 재미 안에 사회적 현실을 담아 다른 두 작품이 대상과 유지하는 거리보다는 조금 가까이서 이야기하고 있는 영화이다. 차이는 아마 사회적 현실을 드러내느냐 드러내지 않는냐에 달려있는 듯 한데 이는 영화 형식(영화 언어)적인 특징은 아니며 또한 사회적 현실을 드러내는 것이 반드시 우리 영화의 대안적 돌파구라는 확신이 없다. 그러므로 '초록물고기'가 가장 훌륭한 대안일 수 있다는 말은 아직도 내게 오리무중, 첩첩산중이며 풀어야 할 보람찬 숙제이다.아, 내가 이 숙제를 진작 풀었더라면 이 지면이 얼마나 흥겨운 한 판 굿이 될 수 있었을까?  

# '초록물고기'에 보이는 양식적 특징을 몇가지 살펴보자.

1. 카메라는 다소 긴 테이크에 다소 먼 거리를 유지한다. 그러나 이러한 거리를 벗어나 있는 인물은 막동이며 막동만이 가까운 거리로 자주 포착된다. 단, 미애의 클로즈 업도 막동만큼은 아니지만 꽤나 나타난다.
2. 작품 안에서 드러나는 공간은 막동이 죽은 후를 제외하면 주인공 막동이 위치하고 있는  공간이 대부분이다. 두어개 씬만이 막동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그 공간은 미애가 있는 공간이다)일 뿐이다.
3. 시점 쇼트(극중 인물의 시선으로 카메라를 위치시키는 쇼트)가 종종 나타난다. 그러나 그런 시점 쇼트의 시점은 항상 막동의 시점이다.
4. 컷트 분할을 통해 인물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프레임 안으로 인물을 들어오게 하거나 카메라 워크로 프레임 바깥에 있는 인물을 프레임 안으로 가지고 온다. 그러나 그런 인물의 등장은 깊은 심도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특징들로 '초록물고기'가 관객에게 주는 효과는 어떤 것일까?
먼저 (특징1을 통해) '초록물고기'가 드러내는 세계는 정서적 거리두기와 관찰을 주로 하여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하 주차장에서 판수(송강호)와 막동이 한 판 대결을 하는 5분여나 되는 씬은 단 두 컷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처럼 긴 테이크는 편집에 의해 시간이 인위적으로 조작되지 않기 때문에 객관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막동을 둘러싼 외부에 대한 묘사를 카메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다가가 성취하고 있다. 관객은 모두 영화는 허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사회적 현실을 드러내는 텍스트를 관객에게 현실처럼 각인시키기 위해서는 관객의 이러한 허구 인식을 제거하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다. 때문에 '초록물고기'도 이러한 관객의 허구 인식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특징1을 통해 막동의 외부, 즉 막동과 반목하고 있는 세계인 배태곤과 도시를 그려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막동의 외부에 대한 묘사와는 상반되게 막동에 대해서는 이러한 묘사가 깨어지고 있다. 즉 외부에 대한 정서적 거리두기는 막동에게 지켜지지 않으며 (특징2를 통해) 텍스트는 막동의 개인적인 세계-비록 그 세계는 막동이 대립하고 있는 세계와 맞닿아 있다 하더라도-에 천착하여 그 외부를 드러내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텍스트는 언제나 막동 중심이며 (특징3을 통해) 막동의 시선으로 우리는 텍스트의 세계를 감지해 나간다. 곧 텍스트가 선정한 세계를 들여다 보는 창구로 막동을 내세우며 그러한 막동의 세계를 통해 우리는 텍스트 속에 선정된 사회적 현실을 읽고 막동의 눈을 통해 현실을 인식해 가는 셈이다.  

이러한 사실은 다시 특징4를 통해 재확인된다. 막동이 미애가 속해있는 도시의 공간으로 처음 들어가는 순간은, 미애를 다시 만나기 위해 막동이 나이트 클럽에 들어가는 바로 그 순간인데 거기에서 도시의 또 다른 희생자 미애가 프레임에 들어오는 방법은 흥미롭다. 좌석에 앉은 채 술을 주문한 막동은 잠시 홀 안을 두리번거리는데 막동의 시선에 따라 움직이던 카메라가 막동을 크게 잡고 그 깊은 심도에서 조그맣게 미애를 프레임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때 카메라의 초점은 막동에게 던져져 있다. 곧 막동의 시선처럼 움직이던 카메라가 화면의 가장 두드러진 피사체로 막동을 잡아낸 후 그 뒤로 미애를 포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계의 주요 대조는 막동이며 미애는 그 막동의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또 다른 세계와의 교접점이다. 이러한 화면 구성은 여러 차례 반복된다. 미애가 배태곤에 의해 몸을 팔러 호텔에 들어갔다 나올 때 그 초췌한 모습은 카메라 초점이 나간 채로 막동의 미디엄 쇼트 정도의 화면의 깊은 심도로부터 들어온다거나 하는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은 잠시 애매하게 느껴지는데 막동의 외부 세계에 대한 묘사에 쓰인 거리두기가 막동에게는 지켜지지 않는 탓에 관객은 막동에게만은 자신의 자아 투영이 가능해져 동일화가 이루어지는 점 때문이다. 막동 역시 텍스트의 일부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는 텍스트에 대한 거리두기 혹은 텍스트가 그려내는 현실에 대한 거리두기를 포기하여 극적 허구에 머물러 버리고 마는 것이거나 관객에게 제거하려 했던 허구 인식을 완전하게 얻어내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허구 인식이 무참하게 깨어지는 부분은 마지막 장면에서 미애가 막동의 집에서 식사를 한 후 그 집이 막동의 집이라는 것을 알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다. 세계에 대한 정서적 거리두기는 여기에서 무너져 막동과 동일화된 관객의 정서적 거리는 막동에 대한 미애의 눈물에 의해 사라져 버리고 만다. 이는 주인공 막동과 대립한 세계에서 그를 구원할 수 있었던 가능성을 지닌 미애로부터 구원받지 못한 막동에 대한 (비록, 세계와의 대립에서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은 현실의 법칙에 충실했다 하더라도) 신파적 슬픔과 흡사하다. 결국 '초록물고기'는 완벽한 극의 영화이며 문학의 서사에 상당 부분 의지하고 있는 영화이다. 그러나 극영화들이 영화의 매체적 한계를 좁히고 있다고는 하더라도 극영화의 가장 커다란 메리트는 서사이며 이 서사가 훌륭하다는 것은 극영화의 가장 커다란 미덕일 것이다.  

# 그러므로 '초록물고기'는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의 극적 구조를 훌륭하게 따르고 있는 서사의 탄탄함을 보여준다. 영화의 첫 장면, 기차 안에서 미애의 빨간 마후라(?)를 얻게 되는 그 장면이 바로 영화의 커다란 축을 끌고 가는 발단이며 보통의 영화들이 처음 5분에서 관객을 붙들어 매지 않으면 실패한다는 헐리우드 시스템 원칙에 의해 영화의 첫 5분 안에 파격적인 섹스씬이라든가 과격한 액션 장면, 시각적이며 감각적인 장쾌함에 몰두하여 용두사미가 되는 것에 비한다면 서사의 중심 핵을 첫 5분의 발단에 드러내 관객을 붙들어 매는 탄탄한 서사 구축은 참으로 통쾌하고 시원하다. 그리고 이 빨간 마후라는 빨랫줄에 매달린 삽입 화면 등을 통해 메타포로 계속 강조된다. 곧 문학적 효과를 영화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서사 구축는 살아있는 인물을 만들어 냄으로써 더욱 생동하게 된다. 막동, 막동의 형들, 미애, 배태곤, 판수(송강호) 등은 각각 커다란 대립 구조, 전통과 산업화, 가족과 도시, 빛과 어둠이라는 대조된 세계 안에서  전형적 인물로 판박아지지 않고 세계를 그려내는 수단으로 다의적으로 보여진다. 전언한 대로 막동은 가족을 대표하는 전형적 인물이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미애도 도시를 대표하지 않으며 배태곤 역시 도시나 어둠을 대표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피해자이거나 도피자이며 진정한 대립은 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연기는 역시 문성근이 한석규보다는 한 수 위다. '초록물고기'를 다시 한 번씩 보라. 막동은 순수하면서도 굉장한 다혈질인 인물이지만 한석규의 연기는 이러한 막동의 성격을 충분히 쫓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에 비해 배태곤이라는 인물의 이기적 욕망과 악함은 문성근의 연기 안에서 살아나고 있다. 그리고 또한 판수의 리얼한 연기를 우리는 잊지 못할 것이다. (아마 송강호 연기의 정점은 '넘버3'이 아니고 '초록물고기'가 아니었나 싶다)  

# 사실 '초록물고기'를 그럴싸하게 읽어내기에는 내 힘이 너무도 벅차다. 안 그래도 잔뜩이나 역부족인 공력이 바닥을 보이는 것 같아 땅파고 기어 들어가고 싶은 정도다. 더군다나 '초록물고기'에 대한 이 글의 본래 목적은 작품 안에서 이창동을 읽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글에서 대체 어디에 이창동이 드러나 있는가? 물론 작품 하나로 그를 읽어낸다는 것은 앞서 말한대로 싸가지 몰수한 택도 없는 짓거리다. 그래도 어쩔테가? 편집장이 시키는대로 까라면 까야지.  

그러나 한 가지 대강 감이 오는 부분은 있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그의 작품은 문학적 힘이 대단히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소설가였다는 사실을 잊어주길 바라는 듯 하다. 그의 소설과 그의 영화를 연관시키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그의 소설가 전력을 말해주는 듯이 탄탄하고 매력적인 서사의 세계를 펼쳐내고 있다. 모든 연출가들이여.. 특히 스스로 시나리오도 쓰고 연출도 하는 싱어송 라이터 감독들이여. 먼저 소설을 전공하라. '초록물고기'의 성공은 바로 그에 기인하고 있으니까.  

지금 '박하사탕'이 관심의 태풍을 몰아치고 있다. 만약 이런 '박하사탕' 역시 훌륭한 작품이라면 그 바탕에는 문학의 힘, 서사의 힘이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그 누가 극영화에서 이런 서사의 힘을 거부할 수 있으랴!! 아마 '박하사탕' 읽기 또는 이창동 읽기의 시금석은 바로 이런 서사의 아름다움을 읽어내는 데에서 비롯될 것이다.


철구 백
2003/01/12 06:33 2003/01/12 0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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