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하사탕'이 막 제작되었을 때만 해도 이 영화를 공동 제작한 이스트 필름의 사장님인 우리의 명배우 아저씨는(명계남이라는 것은 다 알겠쥐?) Anti-Star System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단 한 명의 스타도 출연하지 않는 '박하사탕'이 그의 침에 홀딱 젖도록 침을 튀기며 칭찬을 날렸었다. 부산 국제 영화제에 '박하사탕'이 개봉작으로 선정된 후 영화의 쥔공이었던 설경구의 명연기에 스포트라이트가 터지자 이제 '박하사탕'의 찌라시에는 '새로운 스타-설경구의 탄생'이라는 굵직한 카피가 다시 '박하사탕'을 흠뻑 젖게끔 침을 튀기고 있다. (사실, 명배우 아저씨의 소신없는 연기보다 은막의 신인인 설경구의 피를 토하는 연기가 억수로 훌륭하다. 명배우 아저씨는 이제 연기하는 것에는 관심 없나 보다. 그럼 앞으로 뭐라 부르지? 명감투 아저씨? 명정치가 아저씨?)
그러나 '박하사탕'을 홍보하는 어떤 영상물이든 혹은 제 아무리 쥑이는 카피든 간에 '박하사탕'의 진면목을 제대로 홍보할 수는 없다. 나 철구는 '박하사탕'을 보고 극장을 나오는 바로 그 순간 '어찌 감히 이 영화를 보고 세치 혀, 세마디 손가락을 놀릴 수 있으랴!'라는 엄청난 중압감과 함께 이창동과 김형구에 대한 종교와 같은 경외심에 빠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김형구는 작고하신 유영길님을 이을만한 촬영감독입니다. 그의 놀라운 스타일은 '박하사탕'으로 한번 더 일기당천 한 듯 합니다. 무슨 무슨 영화를 찍었냐구요? 놀라지 마시길... '닥터봉' '박봉곤 가출사건' '진짜 사나이'를 비롯한 초기 작품에서 출발하여 '비트' '태양은 없다' '이재수의 난' '아름다운 시절' 등등등 임다요)
사실, '초록물고기'에 대해서 나는 몇가지 불만을 품고 있었다. 저번 기획기사였던 '초록물고기 초장찍기'에서도 언급했지만 '초록물고기'에 쏟아진 한국형 리얼리즘이란 상찬이 대체 가능한 소리냐? 혹은 한석규 연기가 훌륭하냐? 이야기에만 너무 매달려 영화 언어도 일관적이지 못할 뿐 더러 결말에 가서는 이야기의 객관성도 죽어버린 것 아니냐? 정도... 그러나 이제사 알게 되었다. 이창동 감독이 오래 전부터 하고 싶어 가슴속에 담아놓았던 이야기는 바로 이 '박하사탕'이였고 '초록물고기'는 신인감독이 영화판의 현실과 타협하기 위해 만든 급조된 작품이었다는 사실을. 아, 이제사 알게 되었다. 이창동 감독이 꼭 짱박아 꼬불쳐 두었던 리얼리즘이 무엇인지를. 그 리얼리즘의 형식 안에서 다시 리얼리즘의 정신을 어떻게 펼치고 싶어했었는지를. 그리고 그로써 그가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어했던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를..... 쇠대가리 마냥 우매한 철구는 이제사 알아채 버린 것이었다.
지난 기획기사에서도 밝혔듯이 이창동은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그의 전직업이었던 소설이나 지금의 직업인 영화나 모두 이야기에 뿌리하며 '현재의 모든 뛰어난 이야기꾼은 영화를 하고 있다'는 스스로의 말처럼 그 역시 소설이든 영화든 간에 담아내고 싶었던 것은 이야기이다. 물론 그의 이야기가 헐리웃 스릴러 영화들처럼 치밀한 구성과 속임수 아래 놀라서 애 떨어질 만한 반전을 준비해둔다거나 가슴과 오금을 찌릿 짜릿하게 하는 눈물배인 로맨스를 구라친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만이 훌륭한 이야기고 뛰어난 이야기라고 결코 말할 수 없다. 특히나 울나라같이 나쁜 나라에서 이런 이야기만 이야기하고 산다는 것은 현실에 대한 배..배..배반, 배신이다. 그런 이유로 이창동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바로 현실의 이야기이며 '초록물고기'에서 조금 들려준 그 현실의 이야기는 '박하사탕'을 통하여 본격적으로 비판적 리얼리즘이란 꽃을 피운 것이다.
사실, 리얼리즘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은 모든 이론가들의 고민꺼리고 쇠대가리인 철구 역시 벼룩의 간만큼은 고민하고 있을 지경이다. 그래도 일단 리얼리즘이라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현실을,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그로써 진실을 이야기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현실을 이야기한다는 그 자체는 그러한 진실이 관념론적인 것이 아닌 현실 안에, 현실의 문제와 모순 안에 그것을 넘어서 존재하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때문에 리얼리즘을 논하면서 현실과 사회를 지워낼 수는 없다.
한편, 영화라는 매체는 그 자체가 리얼리즘의 완결체처럼 보이며 다른 어떠한 예술 장르보다 현실을 가장 완벽하게 재현해 낸다. 그로써 리얼리즘에 대한 모든 고민이 마침표를 찍은 듯이 보였지만 영화는 그때부터 다시 더욱 현실에 가까운 리얼리즘을 향해 치열한 고민을 던지기 시작했다. 한 피사체를 놓고 그것을 위에서 찍어내느냐 옆에서 혹은 아래서 찍어내느냐에 따라 현실은 달라 보이므로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내재한 리얼리즘의 속성이 완벽한 객관성에는 도달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극영화가 조명하는 현실은 이미 그 자체가 허구, 바로 거짓일 따름이다.
그런 이유로 아무리 객관적인 형식 안에서 실제 현실을 다큐멘터리로 찍어낸다 하더라도 다소간의 현실에 대한 왜곡은 불가피하다. 이점에서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영화의 리얼리즘이란 말할 나위도 없어진다. 한편으로는 이와 같은 영화의 어떠한 형식적 접근도 결코 사실적일 수 없다는 신념 아래 그것이 촬영되고 제작되어지는 흔적마저 보여주는 것이 진정한 리얼리즘이란 새로운 믿음으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도 탄생했다. 그러나 이러한 리얼리즘에 대한 모든 고민은 극영화 안에서는 그다지 소용없는 듯 보이며 너무 형식적 접근에만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리얼리즘이란 무엇인가!! 앞서 말했듯 현실을 이야기함으로써 현실의 문제와 모순 안에 죽어있는 진실을 살려 일깨우는 것이 아닌가? 몽타쥬든 바쟁 미학이든 시네마 베리테의 다큐멘터리든지 간에 현실의 모순 안에 살아숨쉬는 진실을 잡아내기만 한다면 그것이 바로 리얼리즘이다. 모든 형식의 리얼리즘은 정신의 리얼리즘을 앞설 수 없다는 것이 나 철구가 믿는 리얼리즘인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나에겐 이탈리아 신사실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도그마 95와 에이젠쉬타인까지 혁명을 기도하는 모든 영화인들은 전부 리얼리스트들이다.
그런 까닭으로 이창동 역시 나에겐 리얼리스트이다. 그가 '박하사탕'에서 보여준 좀 더 노골적인 롱테이크나 롱샷의 사실적인 형식 때문에 그가 리얼리스트가 되는 것이 아니다. '박하사탕'보다 더 노골적이고 대가리 쥐나게 했던 '강원도의 힘'도 있었는데 겨우 그 정도의 형식적인 객관성 때문에 그를 리얼리스트라고 말할 수 없을 뿐더러 정성들여 짠 화면 구성(특히 물망초라는 술집 장면)들은 그것이 인위적인 현실의 왜곡이라는 사실을 뻔히 보여주고 있는데 어찌 롱테이크와 롱샷만을 가지고 그를 리얼리스트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런 것은 그에겐 모두 수단일 뿐이며 그가 진정한 리얼리스트인 이유는 그가 '박하사탕'에서 파헤쳐낸 우리 현대사의 질곡이라는 현실의 문제와 모순 때문이고 그를 통해 이미 우리가 죽여버렸던 진실인 순수-바로 순임의 '박하사탕'을 되살렸기 때문이다.
사족을 붙여서, 바쟁식의 객관적인 롱테이크와 롱샷이든 아이젠쉬타인의 몽타쥬든 도그마 95의 자기 반영성이든지 간에 그것이 모두 리얼리즘이라면 이를 좀더 세분화할 필요가 있고 '박하사탕'에서 보이는 리얼리즘 역시 좀더 구체적으로 확정시킬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는 학자와 이론가들의 몫이고 아직 공론화된 어떤 무엇이 나오지는 않았다. 때문에 나 철구는 앞서 이창동에게 비판적 리얼리즘의 꽃을 피웠다는 표현을 쓴 것이다. 비판적 리얼리즘이란 '사실적'이라는 방식으로 사회와 현실의 문제를 드러냈던 문예사조로써 문학용어이며 사회주의적 방법을 통해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제거해야 한다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와는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여튼, 이에 비추어 볼 때 '박하사탕'은 그 형식에서 객관적인 형식을, 내용에서 사회의 모순과 문제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비판적 리얼리즘에 적합하며 이러한 사조가 문학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에서 그의 영화는 그의 문학적인 밑천에서 출발한 이야기의 연장처럼 느껴진다. 아님말고...
어쨌든, 이처럼 이창동이 보이는 리얼리즘의 성격을 규정한는 것을 통해 그의 영화를 리얼리즘이니, 밑도 끝도 없이 튀어나온 용어인 한국형 리얼리즘이니 하고 씨부리는 것이 '오늘, 그녀가 다리를 벌렸다(??)'는 식의 에로 영화 홍보 카피만큼 불친절하기 그지 없는 노릇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이로써 그나마 '박하사탕'의 정체가 명료해졌다. 그의 영화가 보여주는 정신이 비판적 리얼리즘이라고 한다면 그가 영화 내내 고수하는 롱테이크와 롱샷의 효과는 현실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보여주려는 의도이며 그러한 형식적 방법을 통해 현대사가 개인에게 압제했던 모순과 그로 비롯된 현대의 문제를 들춰내고 싶었던 것이다. 이로써 리얼리즘을 위해 분투하던 다양한 형식 실험이 이창동에게서는 일단락된다. 왜냐하면 그의 영화가 보여주려 하는 사실성이라는 것은, 현실에 카메라를 들이미는 행위 자체는 매체 자체의 현실 왜곡을 파생하기 때문에 그것을 줄이려는 측면에서의 사실성도 아니며, 리얼리즘에 내재한 혁명의 정신에 의해 작품의 기초를 현실에 대한 사실적 인식으로만 제한하려 했던 편협한 반예술적 사실성도 아니라, 작품이 전하는 이야기, 곧 서사 자체에 대한 사실성이기 때문이다.
비판적 리얼리즘이라는 것 역시 리얼리즘을 위해 예술이 존재하기 보다는 예술을 위해 리얼리즘이 존재할 뿐이며 '박하사탕' 역시 현실을 위해 '박하사탕'이 존재하기 보다는 '박하사탕'을 위해 리얼리즘이 쓰여졌을 뿐이다. 사실, '박하사탕'이 초점하는 김영호라는 인물의 생애가 결코 일상적이거나 현실적인 삶이라고는 할 수 없고 많은 부분 특별하며 때로는 극적이기도 하다. 가난한 공장 노동자로 독재의 시절 노조 활동을 하다가 군대에 들어가서는 광주 진압군으로 투입돼 무고한 여학생을 우발적으로 한 명 죽이고 제대 후 경찰이 되어 민주화 세력에게 고문을 일삼다가 경찰을 그만 두고서는 가구점을 차려 사업을 번창시키더니 급기야 IMF로 사업이 망해 아내와 이혼하고 가난했던 청년 노동자 시절의 순수로 돌아가고파 자살을 한다. 참, 우리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은 모두 다 몸으로 겪은 기구한 운명의 인물이다. 인물 뿐 아니라 이야기의 구성 역시 시간의 역순을 통해 일곱 개의 단란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앞단락의 결과를 뒷단락의 원인으로 설명해 주는 치밀하게 짜여진 탄탄함을 보인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와 같은 영화들이 형식에서의 리얼리즘 뿐만 아니라 이야기에서의 리얼리즘까지 성취하려 했던 것과 견주어 보면 이창동이 조명하는 이야기라는 것이 얼마나 극적인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런 이유로 그의 리얼리즘은 이야기의 사실성을 얻어내기 위한 방법으로 쓰여졌을 뿐이다.
이야기의 사실성을 성취하기 위한 '박하사탕'의 형식은 여러 부분에서 '초록물고기'와 비슷하다. '초록물고기'에서도 이야기에 대해서는 객관적이며 사실적이지만 주인공 막동에게서는 그것이 깨어져 빗나가고있다. 다시 말해, 막동의 외부에 대해서는 롱테이크와 롱샷을 주무기로 묘사하고 있지만 막동에게만은 롱테이크와 롱샷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박하사탕'에서도 반복되어 주인공 김영호에게만은 카메라의 세밀한 묘사를 허용한다. 그리고 그 커다란 줄기는 일곱 개 중에 첫 단락인 '야유회'의 마지막 커트, '나 돌아갈래!'하고 외치는 김영호의 클로즈 업에서 마지막 단락 '소풍'의 마지막 커트, 눈물 흘리는 김영호의 클로즈 업으로 연결된다. '야유회'와 '소풍'은 각각 20년이라는 시간적 차이는 있지만 같은 공간이며 20년을 거슬러 올라간 김영호는 마치 첫 단락 야유회를 기억하는 것처럼 '여기 언젠가 와 본 것 같아' 하며 까닭모를 눈물을 흘림으로써 '박하사탕'은 김영호라는 개인의 비극에 대해 얼마간의 연민을 느끼게끔 관객에게 장치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형식의 객관성이 전체적으로 '초록물고기'보다 훨씬 더 노골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처럼 인물을 앞세워 극을 창조해 내는 것이 비록 리얼리즘을 위해 예술이 존재한다는 혹은 현실을 위해 예술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비난을 받을 지라도, 그래서 김영호에게만은 객관적인 묘사를 포기하는 형식을 선택함으로써 집단이 아닌 개인을 조명하여 실재하지 않는 허구로 관객을 선동한다는 비난을 받을 지라도 이만큼 아름답고 선명하고 사실적이라면 감히 예술이라 말할 수 있을 듯 싶다. 허구이지만 사회를 투철하게 드러냄으로써 부도덕하지 않으며, 사회를 드러내지만 시간을 역행하는 완벽하고 치밀한 서사 구성의 형식미와 그 메시지에 의해 예술적이다.
그 예술적인 승화는 마지막 단락에서 성공한다. 그의 영화 두 편은 모두 마지막 장면에서 극적 사실성을 포기하고 주인공에 대한 연민을 강조하는데 '초록물고기'에서는 그것이 막동의 가족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나서 그곳이 막동의 집임을 알아차린 미애(심혜진)의 눈물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 눈물은 영화를 조지는 눈물이었고 그토록 막동의 죽음을 강조할 필요없이 그냥 스쳐가기만 함으로써 극의 허구나 우연을 자제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으리라. 때문에 미애의 눈물은 신파의 눈물에 불과하게 되었다. (아마 좀 더 눈물나게 만들라는 외압이 분명하다. 울어라 울어라 주문 건다고 해서 진짜로 슬프지는 않다는 것을 우리는 과거 신파영화와 최루성 멜로 영화에서 확인한 바 있다)
하지만 '박하사탕'에서 보이는 마지막 장면은 이와 다르다. 1979년의 김영호는 영화의 첫단락, 1999년의 자신이 자살한 그 장소에 1999년의 자신이 돌아가고 싶어했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는 '여기 언젠가 와 본 것 같아'하고 되뇌이면서 영화의 첫 커트였던 99년의 자신이 누워있던 그 철교 밑 바로 그 장소에 가서 누워보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영화는 환상적이기까지 하다. 과거의 인물이 미래에 일어날 자신의 비극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사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며 이로써 극적 사실성은 깨어진다. 하지만 이는 '초록물고기'가 극적 사실성을 우연적인 현실 사건을 계기로 깨뜨림으로써 실패했던 것과는 엄연히 다른다. 왜냐면 '박하사탕'의 마지막 장면이 보여주는 것과 같은 불가능한 상황을 극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이 상상력이며 영화이며 예술이기 때문이다. '박하사탕'의 마지막 장면이 유보한 극적 사실성은 그런 이유로 관객의 상상과 창조적인 인식의 문을 두드리며 김영호라는 개인에게 집단이, 사회가, 독재와 모순과 거짓이 얼마나 폭압적이었으며 부조리했던가를 보여준다. 나아가 그 폭압과 부조리가 이처럼 눈물을 흘리게 하는 일이며 때문에 2000년을 살아가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아직도 예술이란 무엇인지 모르는 쇠대가리 철구마저도 '이것이 예술이구나'하는 생각을 절대 떨쳐버릴 수 없었다.
몇 시간 전 인터넷 상의 모 영화잡지에서 영평가 강한섭의 글을 읽었다. 그가 헐리우드 키드라는 사실은 진작 알고 있었던 터지만 또 다시 많은 부분 실망스러운 발언을 감행하고 있었다.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을 우리는 왜 못 따라가는 것일까? 그 자본과 기술은 못 따라가더라도 상상력은 따라갈 수 있는 것 아닐까? 우리에게는 상상력조차 없는 걸까?'라고 대강 결론 맺는 그의 글에 대해 나는 '제발 박하사탕을 유념해서 봐주시길...'이라는 답을 하고 싶다. 헐리웃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아무리 많은 자본과 뛰어난 기술을 쏟아붓더라도 결코 상상할 수 없고 만들 수 없는 영화가 바로 여기에 있으니 말이다.
철구 백
그러나 '박하사탕'을 홍보하는 어떤 영상물이든 혹은 제 아무리 쥑이는 카피든 간에 '박하사탕'의 진면목을 제대로 홍보할 수는 없다. 나 철구는 '박하사탕'을 보고 극장을 나오는 바로 그 순간 '어찌 감히 이 영화를 보고 세치 혀, 세마디 손가락을 놀릴 수 있으랴!'라는 엄청난 중압감과 함께 이창동과 김형구에 대한 종교와 같은 경외심에 빠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김형구는 작고하신 유영길님을 이을만한 촬영감독입니다. 그의 놀라운 스타일은 '박하사탕'으로 한번 더 일기당천 한 듯 합니다. 무슨 무슨 영화를 찍었냐구요? 놀라지 마시길... '닥터봉' '박봉곤 가출사건' '진짜 사나이'를 비롯한 초기 작품에서 출발하여 '비트' '태양은 없다' '이재수의 난' '아름다운 시절' 등등등 임다요)
사실, '초록물고기'에 대해서 나는 몇가지 불만을 품고 있었다. 저번 기획기사였던 '초록물고기 초장찍기'에서도 언급했지만 '초록물고기'에 쏟아진 한국형 리얼리즘이란 상찬이 대체 가능한 소리냐? 혹은 한석규 연기가 훌륭하냐? 이야기에만 너무 매달려 영화 언어도 일관적이지 못할 뿐 더러 결말에 가서는 이야기의 객관성도 죽어버린 것 아니냐? 정도... 그러나 이제사 알게 되었다. 이창동 감독이 오래 전부터 하고 싶어 가슴속에 담아놓았던 이야기는 바로 이 '박하사탕'이였고 '초록물고기'는 신인감독이 영화판의 현실과 타협하기 위해 만든 급조된 작품이었다는 사실을. 아, 이제사 알게 되었다. 이창동 감독이 꼭 짱박아 꼬불쳐 두었던 리얼리즘이 무엇인지를. 그 리얼리즘의 형식 안에서 다시 리얼리즘의 정신을 어떻게 펼치고 싶어했었는지를. 그리고 그로써 그가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어했던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를..... 쇠대가리 마냥 우매한 철구는 이제사 알아채 버린 것이었다.
지난 기획기사에서도 밝혔듯이 이창동은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그의 전직업이었던 소설이나 지금의 직업인 영화나 모두 이야기에 뿌리하며 '현재의 모든 뛰어난 이야기꾼은 영화를 하고 있다'는 스스로의 말처럼 그 역시 소설이든 영화든 간에 담아내고 싶었던 것은 이야기이다. 물론 그의 이야기가 헐리웃 스릴러 영화들처럼 치밀한 구성과 속임수 아래 놀라서 애 떨어질 만한 반전을 준비해둔다거나 가슴과 오금을 찌릿 짜릿하게 하는 눈물배인 로맨스를 구라친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만이 훌륭한 이야기고 뛰어난 이야기라고 결코 말할 수 없다. 특히나 울나라같이 나쁜 나라에서 이런 이야기만 이야기하고 산다는 것은 현실에 대한 배..배..배반, 배신이다. 그런 이유로 이창동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바로 현실의 이야기이며 '초록물고기'에서 조금 들려준 그 현실의 이야기는 '박하사탕'을 통하여 본격적으로 비판적 리얼리즘이란 꽃을 피운 것이다.
사실, 리얼리즘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은 모든 이론가들의 고민꺼리고 쇠대가리인 철구 역시 벼룩의 간만큼은 고민하고 있을 지경이다. 그래도 일단 리얼리즘이라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현실을,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그로써 진실을 이야기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현실을 이야기한다는 그 자체는 그러한 진실이 관념론적인 것이 아닌 현실 안에, 현실의 문제와 모순 안에 그것을 넘어서 존재하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때문에 리얼리즘을 논하면서 현실과 사회를 지워낼 수는 없다.
한편, 영화라는 매체는 그 자체가 리얼리즘의 완결체처럼 보이며 다른 어떠한 예술 장르보다 현실을 가장 완벽하게 재현해 낸다. 그로써 리얼리즘에 대한 모든 고민이 마침표를 찍은 듯이 보였지만 영화는 그때부터 다시 더욱 현실에 가까운 리얼리즘을 향해 치열한 고민을 던지기 시작했다. 한 피사체를 놓고 그것을 위에서 찍어내느냐 옆에서 혹은 아래서 찍어내느냐에 따라 현실은 달라 보이므로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내재한 리얼리즘의 속성이 완벽한 객관성에는 도달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극영화가 조명하는 현실은 이미 그 자체가 허구, 바로 거짓일 따름이다.
그런 이유로 아무리 객관적인 형식 안에서 실제 현실을 다큐멘터리로 찍어낸다 하더라도 다소간의 현실에 대한 왜곡은 불가피하다. 이점에서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영화의 리얼리즘이란 말할 나위도 없어진다. 한편으로는 이와 같은 영화의 어떠한 형식적 접근도 결코 사실적일 수 없다는 신념 아래 그것이 촬영되고 제작되어지는 흔적마저 보여주는 것이 진정한 리얼리즘이란 새로운 믿음으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도 탄생했다. 그러나 이러한 리얼리즘에 대한 모든 고민은 극영화 안에서는 그다지 소용없는 듯 보이며 너무 형식적 접근에만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리얼리즘이란 무엇인가!! 앞서 말했듯 현실을 이야기함으로써 현실의 문제와 모순 안에 죽어있는 진실을 살려 일깨우는 것이 아닌가? 몽타쥬든 바쟁 미학이든 시네마 베리테의 다큐멘터리든지 간에 현실의 모순 안에 살아숨쉬는 진실을 잡아내기만 한다면 그것이 바로 리얼리즘이다. 모든 형식의 리얼리즘은 정신의 리얼리즘을 앞설 수 없다는 것이 나 철구가 믿는 리얼리즘인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나에겐 이탈리아 신사실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도그마 95와 에이젠쉬타인까지 혁명을 기도하는 모든 영화인들은 전부 리얼리스트들이다.
그런 까닭으로 이창동 역시 나에겐 리얼리스트이다. 그가 '박하사탕'에서 보여준 좀 더 노골적인 롱테이크나 롱샷의 사실적인 형식 때문에 그가 리얼리스트가 되는 것이 아니다. '박하사탕'보다 더 노골적이고 대가리 쥐나게 했던 '강원도의 힘'도 있었는데 겨우 그 정도의 형식적인 객관성 때문에 그를 리얼리스트라고 말할 수 없을 뿐더러 정성들여 짠 화면 구성(특히 물망초라는 술집 장면)들은 그것이 인위적인 현실의 왜곡이라는 사실을 뻔히 보여주고 있는데 어찌 롱테이크와 롱샷만을 가지고 그를 리얼리스트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런 것은 그에겐 모두 수단일 뿐이며 그가 진정한 리얼리스트인 이유는 그가 '박하사탕'에서 파헤쳐낸 우리 현대사의 질곡이라는 현실의 문제와 모순 때문이고 그를 통해 이미 우리가 죽여버렸던 진실인 순수-바로 순임의 '박하사탕'을 되살렸기 때문이다.
사족을 붙여서, 바쟁식의 객관적인 롱테이크와 롱샷이든 아이젠쉬타인의 몽타쥬든 도그마 95의 자기 반영성이든지 간에 그것이 모두 리얼리즘이라면 이를 좀더 세분화할 필요가 있고 '박하사탕'에서 보이는 리얼리즘 역시 좀더 구체적으로 확정시킬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는 학자와 이론가들의 몫이고 아직 공론화된 어떤 무엇이 나오지는 않았다. 때문에 나 철구는 앞서 이창동에게 비판적 리얼리즘의 꽃을 피웠다는 표현을 쓴 것이다. 비판적 리얼리즘이란 '사실적'이라는 방식으로 사회와 현실의 문제를 드러냈던 문예사조로써 문학용어이며 사회주의적 방법을 통해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제거해야 한다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와는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여튼, 이에 비추어 볼 때 '박하사탕'은 그 형식에서 객관적인 형식을, 내용에서 사회의 모순과 문제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비판적 리얼리즘에 적합하며 이러한 사조가 문학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에서 그의 영화는 그의 문학적인 밑천에서 출발한 이야기의 연장처럼 느껴진다. 아님말고...
어쨌든, 이처럼 이창동이 보이는 리얼리즘의 성격을 규정한는 것을 통해 그의 영화를 리얼리즘이니, 밑도 끝도 없이 튀어나온 용어인 한국형 리얼리즘이니 하고 씨부리는 것이 '오늘, 그녀가 다리를 벌렸다(??)'는 식의 에로 영화 홍보 카피만큼 불친절하기 그지 없는 노릇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이로써 그나마 '박하사탕'의 정체가 명료해졌다. 그의 영화가 보여주는 정신이 비판적 리얼리즘이라고 한다면 그가 영화 내내 고수하는 롱테이크와 롱샷의 효과는 현실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보여주려는 의도이며 그러한 형식적 방법을 통해 현대사가 개인에게 압제했던 모순과 그로 비롯된 현대의 문제를 들춰내고 싶었던 것이다. 이로써 리얼리즘을 위해 분투하던 다양한 형식 실험이 이창동에게서는 일단락된다. 왜냐하면 그의 영화가 보여주려 하는 사실성이라는 것은, 현실에 카메라를 들이미는 행위 자체는 매체 자체의 현실 왜곡을 파생하기 때문에 그것을 줄이려는 측면에서의 사실성도 아니며, 리얼리즘에 내재한 혁명의 정신에 의해 작품의 기초를 현실에 대한 사실적 인식으로만 제한하려 했던 편협한 반예술적 사실성도 아니라, 작품이 전하는 이야기, 곧 서사 자체에 대한 사실성이기 때문이다.
비판적 리얼리즘이라는 것 역시 리얼리즘을 위해 예술이 존재하기 보다는 예술을 위해 리얼리즘이 존재할 뿐이며 '박하사탕' 역시 현실을 위해 '박하사탕'이 존재하기 보다는 '박하사탕'을 위해 리얼리즘이 쓰여졌을 뿐이다. 사실, '박하사탕'이 초점하는 김영호라는 인물의 생애가 결코 일상적이거나 현실적인 삶이라고는 할 수 없고 많은 부분 특별하며 때로는 극적이기도 하다. 가난한 공장 노동자로 독재의 시절 노조 활동을 하다가 군대에 들어가서는 광주 진압군으로 투입돼 무고한 여학생을 우발적으로 한 명 죽이고 제대 후 경찰이 되어 민주화 세력에게 고문을 일삼다가 경찰을 그만 두고서는 가구점을 차려 사업을 번창시키더니 급기야 IMF로 사업이 망해 아내와 이혼하고 가난했던 청년 노동자 시절의 순수로 돌아가고파 자살을 한다. 참, 우리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은 모두 다 몸으로 겪은 기구한 운명의 인물이다. 인물 뿐 아니라 이야기의 구성 역시 시간의 역순을 통해 일곱 개의 단란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앞단락의 결과를 뒷단락의 원인으로 설명해 주는 치밀하게 짜여진 탄탄함을 보인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와 같은 영화들이 형식에서의 리얼리즘 뿐만 아니라 이야기에서의 리얼리즘까지 성취하려 했던 것과 견주어 보면 이창동이 조명하는 이야기라는 것이 얼마나 극적인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런 이유로 그의 리얼리즘은 이야기의 사실성을 얻어내기 위한 방법으로 쓰여졌을 뿐이다.
이야기의 사실성을 성취하기 위한 '박하사탕'의 형식은 여러 부분에서 '초록물고기'와 비슷하다. '초록물고기'에서도 이야기에 대해서는 객관적이며 사실적이지만 주인공 막동에게서는 그것이 깨어져 빗나가고있다. 다시 말해, 막동의 외부에 대해서는 롱테이크와 롱샷을 주무기로 묘사하고 있지만 막동에게만은 롱테이크와 롱샷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박하사탕'에서도 반복되어 주인공 김영호에게만은 카메라의 세밀한 묘사를 허용한다. 그리고 그 커다란 줄기는 일곱 개 중에 첫 단락인 '야유회'의 마지막 커트, '나 돌아갈래!'하고 외치는 김영호의 클로즈 업에서 마지막 단락 '소풍'의 마지막 커트, 눈물 흘리는 김영호의 클로즈 업으로 연결된다. '야유회'와 '소풍'은 각각 20년이라는 시간적 차이는 있지만 같은 공간이며 20년을 거슬러 올라간 김영호는 마치 첫 단락 야유회를 기억하는 것처럼 '여기 언젠가 와 본 것 같아' 하며 까닭모를 눈물을 흘림으로써 '박하사탕'은 김영호라는 개인의 비극에 대해 얼마간의 연민을 느끼게끔 관객에게 장치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형식의 객관성이 전체적으로 '초록물고기'보다 훨씬 더 노골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처럼 인물을 앞세워 극을 창조해 내는 것이 비록 리얼리즘을 위해 예술이 존재한다는 혹은 현실을 위해 예술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비난을 받을 지라도, 그래서 김영호에게만은 객관적인 묘사를 포기하는 형식을 선택함으로써 집단이 아닌 개인을 조명하여 실재하지 않는 허구로 관객을 선동한다는 비난을 받을 지라도 이만큼 아름답고 선명하고 사실적이라면 감히 예술이라 말할 수 있을 듯 싶다. 허구이지만 사회를 투철하게 드러냄으로써 부도덕하지 않으며, 사회를 드러내지만 시간을 역행하는 완벽하고 치밀한 서사 구성의 형식미와 그 메시지에 의해 예술적이다.
그 예술적인 승화는 마지막 단락에서 성공한다. 그의 영화 두 편은 모두 마지막 장면에서 극적 사실성을 포기하고 주인공에 대한 연민을 강조하는데 '초록물고기'에서는 그것이 막동의 가족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나서 그곳이 막동의 집임을 알아차린 미애(심혜진)의 눈물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 눈물은 영화를 조지는 눈물이었고 그토록 막동의 죽음을 강조할 필요없이 그냥 스쳐가기만 함으로써 극의 허구나 우연을 자제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으리라. 때문에 미애의 눈물은 신파의 눈물에 불과하게 되었다. (아마 좀 더 눈물나게 만들라는 외압이 분명하다. 울어라 울어라 주문 건다고 해서 진짜로 슬프지는 않다는 것을 우리는 과거 신파영화와 최루성 멜로 영화에서 확인한 바 있다)
하지만 '박하사탕'에서 보이는 마지막 장면은 이와 다르다. 1979년의 김영호는 영화의 첫단락, 1999년의 자신이 자살한 그 장소에 1999년의 자신이 돌아가고 싶어했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는 '여기 언젠가 와 본 것 같아'하고 되뇌이면서 영화의 첫 커트였던 99년의 자신이 누워있던 그 철교 밑 바로 그 장소에 가서 누워보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영화는 환상적이기까지 하다. 과거의 인물이 미래에 일어날 자신의 비극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사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며 이로써 극적 사실성은 깨어진다. 하지만 이는 '초록물고기'가 극적 사실성을 우연적인 현실 사건을 계기로 깨뜨림으로써 실패했던 것과는 엄연히 다른다. 왜냐면 '박하사탕'의 마지막 장면이 보여주는 것과 같은 불가능한 상황을 극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이 상상력이며 영화이며 예술이기 때문이다. '박하사탕'의 마지막 장면이 유보한 극적 사실성은 그런 이유로 관객의 상상과 창조적인 인식의 문을 두드리며 김영호라는 개인에게 집단이, 사회가, 독재와 모순과 거짓이 얼마나 폭압적이었으며 부조리했던가를 보여준다. 나아가 그 폭압과 부조리가 이처럼 눈물을 흘리게 하는 일이며 때문에 2000년을 살아가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아직도 예술이란 무엇인지 모르는 쇠대가리 철구마저도 '이것이 예술이구나'하는 생각을 절대 떨쳐버릴 수 없었다.
몇 시간 전 인터넷 상의 모 영화잡지에서 영평가 강한섭의 글을 읽었다. 그가 헐리우드 키드라는 사실은 진작 알고 있었던 터지만 또 다시 많은 부분 실망스러운 발언을 감행하고 있었다.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을 우리는 왜 못 따라가는 것일까? 그 자본과 기술은 못 따라가더라도 상상력은 따라갈 수 있는 것 아닐까? 우리에게는 상상력조차 없는 걸까?'라고 대강 결론 맺는 그의 글에 대해 나는 '제발 박하사탕을 유념해서 봐주시길...'이라는 답을 하고 싶다. 헐리웃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아무리 많은 자본과 뛰어난 기술을 쏟아붓더라도 결코 상상할 수 없고 만들 수 없는 영화가 바로 여기에 있으니 말이다.
철구 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