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너스의 불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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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지키스탄의 어느 변두리 마을. 교사인 아노르는 옆집에 사는 부자인 이웃이 담옆에 만들어 놓은 화장실 악취 때문에 고생한다. 그를 찾아가 화장실을 옮겨달라고 부탁도 하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마을 검사에게 가서 하소연 해봤자 아무런 뇌물없이 부탁하러 온 아르노를 검사는 오히려 나무란다. 화가 난 아르노. 전재산을 털어 검사의 옆집을 산 후 검사의 창 밑에 마을 공동 화장실을 만드는데...



이를 막으려 갖은 수단을 다 쓰던 검사는 아르노의 아들을 절도죄로 감옥에 쳐놓고 그래도 꼼짝하지 않는 아르노에 실망한 그의 부인은 옆집의 부자 이웃에게 몸을 판 후 아들을 구해낸다. 그러나 그런 아르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파들어가던 화장실에서는 물이 샘솟아 우물이 되고 만다. 마을에서 200년만에 나온 우물.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아르노의 우물보다 시냇물을 여전히 더 좋아할 뿐이다.



# 우리의 구호는 '지금, 여기서, 관객과 함께 볼 수 있는 영화를 논하는' 것이다. 그런 구호에 비추어 보면 '벌이 날다'는 다소 위험하며 거리가 있는 듯 보인다. 서울 시내 한 극장에서만 단독 개봉할 뿐만 아니라 지방 개봉은 너무 어려우리라 생각된다. 비디오 출시 역시 불투명하고 출시되었다 하더라도 소점포에서 들여 놓을리 만무하다.



자본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진 깃털처럼 투명한 정신이 담긴 영화는 다시 그 자본으로 구축된 사회에서는 소외된다. 당연하다. 영화는 이제 예술이 아닐 뿐 아니라 소비재 상품이며, 6000원 어치의 맥주나 PC방에서 보내는 여섯 시간의 효용만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 영화의 가치는 대부분 6000원의 효용에 판가름난다. 일주일을 직장에서 시달리다가 기분전환 삼아 본 영화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텔지아'일 수는 없다. '노스텔지아'에서 기분전환을 삼을 수 있는 안목을 모든 사람이 공유한다는 것은 이상일 따름이며, 따라서 이제 영화는 대중예술, 대중산업일 뿐이다. 영화라는 장르의 생명 역시 길어야, 무지무지 길어봤자 앞으로 1세기 정도 밖에 남지 않았고 새로운 기술은 영화라는 장르의 개념을 180도 바꿔 놓을 것이며 그 안에 남은 것은 '서사' 하나일 것이다. 배우도 카메라도 필요없이 CG로 만들어내는 영화가 나올지도 모른다. 소설의 쇠락이 걸어온 길을 영화도 똑같이 걸을 것이다.



영화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은 나의 이 말이 무척이나 거슬리리라. 하지만 사실이 그런 이상 나 역시 슬프긴 매한가지다. 그러나 이런 비관적인 생각 때문에 독자와 내가 함께 고민하는 영화에 대한 상념들이 필요없는 것일까? 결론이, 그 결말이 이미 보인다고 손놓고 앉아 먼 산만 쳐다볼 것인가? 그러한 고민이 건강한 대중예술을 만드는데 일조할 수 있다는 신념이 일본, 대만을 비롯한 아시아 영화의 몰락을 보면서 참담하게 무너져 내리는가?



그래서 아르노는 화장실을 팠다. 그러나 그것은 200년만에 샘솟는 마을 우물이 되었다.



# '벌이 날다'는 서른한살의 젊은 우리 감독 민병훈이 잠셋 우즈마노프라는 사람과 함께 감독하고 촬영하고 편집한 우리 영화다. 이 영화의 홍보 카피에는 '따뜻한' '달콤쌉싸름한' '아름다운 이웃들'이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어있고 따라서 한때 예술영화라는 괴상망측한 분류법에 의해 사람들의 대단한 관심을 끌었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와 같은 훈훈한 이야기인척 하려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며 오히려 다분한 마르크스주의가 녹아있는 영화다. 아마 그 원안이 잠셋 우즈마노프였고 아직도 러시아에 남아있는 사회주의의 전통이 그 까닭인 듯 싶다.



이 영화에 나타나는 대립구도-프롤레타리아와 부르조아-와 프롤레타리아에 편중된 가치의 시선을 어떻게 부인할 것인가? 영화 내내 악인은, 부도덕하며 부유한 이웃집 남자와 매판관료인 검사이고 선인은 그들에게 억압당하는 가난한 아노르와 그 주민들이다. 또한 영화 내내 포착하는 현실의 전형성, 전형적 상황에서 재현되는 전형적 개인의 모습을 어떻게 거부할 것인가? 부르조아와 매판관료는 다른 해석의 시각이 필요없이 부도덕할 뿐이며 아노르와 주민은 순박하고 순수할 뿐 아니라 그들의 그러한 존재방식은 '경험의 모범'대로 대립으로 치닫는 상황이 된다. 때문에 영화가 이루려는 바는 분명하다. 자신들을 억압하는 부르조아 타도. '전함 포템킨'의 병사들이 때문에 폭력으로 배를 장악했다면 '벌이 날다'의 아노르는 검사의 집 옆에 화장실을 파는 방법을 택한다. 이는 '모든 법은 지위에 따라 다르게 적용된다'는 검사의 말에 대한 항변이며 혁명이다.



그런데 만약 아노르의 의도대로 그 곳에 화장실이 완성되고 모든 주민이 그 곳에 용변을 봐서 검사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거나 했다면 영화는 어떻게 되었을까? 어쩌면 우리는 이미 죽은 자의 망령과 같은 사회주의의 처참한 주검만을 단지 재확인하는데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처럼 전개되지 않고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의 사실주의나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제시하는 당성에 충실한 미래의 전망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아노르의 혁명에 대한 열렬한 기도는 파들어가던 땅에서 물이 솟아 화장실이 우물이 되어버림으로써 막을 내리고 마는 것이다.



마을에서 샘솟은 200년만의 우물. 마을 사람들이 좋아하고 기뻐해서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 같은가? 천만에. 마을 사람들은 그 우물물보다 마을 앞 시냇물을 더 좋아하여 아노르의 시도는 화장실도 우물도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을 따름이다. 그래서 영화는 사회주의적인 현실에서 시작하였지만 사회주의적인 비젼을 제시하지 못하는 이상한 변종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놀랍게도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이 영화 '벌이 날다'가 무너진 구소련에 대한 허무주의가 아닌 사회주의에 대한 새로운 희망임을 이야기한다.



"아직 벌들이 우물에 꿀을 따오지 않아서 시냇물보다 맛이 없는거야. 만약 세월이 흘러 벌들이 우물에 꿀을 많이 따온다면 분명 사람들은 이 우물을 찾게 될거야."



공산주의는 붕괴했지만 사회주의는 아직 망하지 않았다고들 한다. 아노르가 파들어간 화장실은 비록 아무도 찾지않는 우물이 되어 무너진 구소련과 같은 꼴이 되었지만 그 열망과 노력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 언젠가 아주 먼 미래에라도 분명 맛있는 우물물이 되어 모든 사람들에게 환영받게 될 것이다. 세상을 구원하리라는 거대한 이데올로기가 무너진 폐허의 허무 속에서 그 허무를 꼭 붙들어 안고서 피워내는 진실. 그러나 그 진실안에는 아무런 혁명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약자와 빈자는 여전히 고통스럽고, 결국 세상은 아직도 불공평하기 그지 없다. 이렇듯 현실이 구원받지 못하였는데 그렇다고 그 희망을 접을 것인가? 아니다. 어떤 희망이라도 그것이 올곧다면 접어서는 안된다. '벌이 날다'는 바로 이 사회주의의 새로운 희망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 한때 사회주의적 각성과 선동을 도맡았던 소비에트 몽타쥬 영화들과 '벌이 날다'의 형식의 대비는 이채롭다. 그 차이는 뚜렷하고 명백한 사회주의적 전망이 희망찼던 시대와 그 잿더미만 남은 시대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인민성에 충실하여 민중을 자각시키고 상부구조의 변혁을 꿈꾸어온 몽타쥬의 창시자들은 제재적 현실을 조각내어 조립하고 강조하는데 열중하였다. 그리고 그 목표는 부분적이지만은 분명 인민의 의식화에 있었다.(물론 에이젠쉬타인의 몽타쥬가 문학 언어에 대한 영화 언어의 순수성을 천명하려는 것이긴 하였지만..) 때문에 의식화라는 측면에서는 몽타쥬가 '벌이 날다'의 형식보다는 효과적일 것이다. 한편 '벌이 날다'의 형식은 계급의 대립이 드러나는 상황을 충실히 반영하려는 사실주의적 고민이 담겨 있다.



비록 무엇이 영화 장르 안에서 진정한 리얼리즘인가 하는 해답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지금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인 이상 그러한 고민에서 비롯되어 포착한 현실은 때문에 의미있는 현실이 된다. 그러한 리얼리즘에 대한 고민이 담긴 형식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보여준 비서사적 일상성을 추구하는 자기반영적인 다큐와 같은 형식으로 혹은 의식화나 강제를 거부하는 바쟁식의 정서적인 거리두기의 객관적 형식으로 나타난다. 그런 고민된 촬영이 압바스나 바쟁과 같은 일관성을 보여주지 못한 채 헷갈리고 있고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긴 하지만 그러한 접근의 노력은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소비에트 몽타쥬 역시 개인의 특수성에 천착하는 극적허구, 관념적 현실을 거부하고 집단의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려 했다는 점에서 '벌이 날다'가 바라보는 사회적 현실 인식과 그다지 다르지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수단이 된 형식은 이처럼 다르다. 결국 이는 손에 잡힐 듯 보이는 희망을 향해 민중을 의식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사라져 보이지 않는 희망을 향해 민중과 함께 직접 찾아가자는 자족적인 질문인 것이다.



# 사회주의든 뭐 든 그것은 일단 차치하고 처음의 고민으로 돌아가자. 독자와 나의 영화에 대한 상념들은 이 시대에 와서는 이제 필요없는 무의미한 것인가? 결론은 슬프지만 보인다. 그렇다. 무의미하다.



대중예술의 본질은 대중에게 있으며, 대중은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산물이기 때문에 자본의 지배하에 구속받을 것이며 따라서 영화가 담당하는 대중의 욕망은 자본에 의해 구축될 것이다. 이 카테고리 안에서 독자와 나 혹은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고 이미 그 안에서 자리잡은 하나의 구성원일 따름이다. 그 누구나 마찬가지다. 자본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영화는 불가능하고 가능하다고 말한다면 십중팔구 이지메와 돌팔매만이 돌아온다. 못되먹은 검사를 혼내주기 위해 화장실을 파봤자 쓸모없는 우물이 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아노르는 희망을 안고 파냈다. 비록 헛일이 되어버렸지만 희망은 버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도 아노르처럼 파들어가야 하는가? 그 수명이 이제 100년도 채 남지않은 영화에 대한 광적인 애정으로 끊임없이 파들어가야 하는가? 왜? 대체 무엇을 위해?



그러나 이미 우리는 땅을 파들어 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여기 '구멍'은 우리가 파들어 간 구멍일지도 모른다. 아노르의 우물이 주는 교훈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철구 백
2003/01/12 06:28 2003/01/12 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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